안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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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진(仲珍)
설강(雪江)
시호
문희(文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01년(연산군 7)
사망 연도
1560년(명종 15)
본관
순흥(順興)
주요 관직
승정원주서|지평|홍문관부제학|자헌대부|이조판서|좌의정
관련 사건
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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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중진(仲珍), 호는 설강(雪江). 병마절도사 안인후(安仁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습독관(習讀官) 안성(安珹)이고, 아버지는 안순필(安舜弼)이다. 어머니는 군수 조강문(趙康門)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1년(중종 16)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정자(正字)가 되고,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 병조정랑을 거쳐 1533년 지평(持平)에 올랐다. 이로부터 삼사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민정을 순행하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직제학 · 부제학을 역임하면서 사필(史筆)의 공정과 사료 보관의 신중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의 사치 풍조를 엄히 단속하고 경비의 절감을 꾀해야 한다고 진언하기도 하였다.

1541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우승지가 되고, 중종이 말년에 숙환으로 고생할 때, 승지로서 의약에 밝아 항상 시종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이조참의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는데 항시 검약하고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아 청렴결백하기로 이름났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을사사화 때는 윤원형(尹元衡) 등에 협조해 윤원형의 추천으로, 1548년(명종 3)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한성부 판윤이 되었고,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올랐다. 한성부판윤으로 재직할 당시에 『중종실록』 편찬에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우참찬 · 호조판서를 거쳐, 1553년에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 행정을 주관하였다.

한 때 인사 청탁을 들어주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계속 승진하여, 다음 해 숭록대부(崇祿大夫)로서 우찬성에 올랐다. 이어 좌찬성 · 판돈녕부사를 지내고, 윤원형의 추천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을 겸하기도 하였다.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판중추부사를 거쳐 1558년 우의정 ·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형제간에 우의가 돈독해 형을 마치 아버지처럼 공경하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여러 차례 당상 문신정시(堂上文臣庭試)에서 문명을 떨쳤고, 경연(經筵)에서의 강설은 세밀하고도 분명하였다.

중후하고 단정해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일을 맡으면 성심껏 수행하였다. 특히, 의술에 정통해 내외 의국(醫局)을 관리하였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국조방목(國朝榜目)』
『사재록(思齋錄)』
『양곡집(陽谷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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