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4년 11월 15일에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이 창경궁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중종은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의 희릉(禧陵)을 건립할 때부터 쌍릉을 계획하여 1515년에 장경왕후의 산릉터를 정할 때 쌍릉으로 건립하기 적합한 헌릉(獻陵) 안을 선택하였다. 암반에 능침을 건립한 것이 논란이 되어 1537년에 고양군으로 희릉을 천릉할 때에도 중종은 세자에게 희릉 곁에 산릉으로 쓸만한 곳이 있으니 잘 알아 두도록 당부하였다.
산릉터의 후보지로 경릉(敬陵)의 청룡(靑龍) 밖과 희릉의 서쪽 150보 지점이 선정되어 도형을 그려 올리니,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1545)은 희릉이 후보지가 되어 반갑게 여겼다. 12월 13일에 희릉 오른쪽에 서북향을 등지고 동남향을 바라보는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능침의 좌향을 정하고, 1545년 2월 3일에 국장을 행하였다.
왕과 왕후의 능침이 하나의 능역에 각각의 언덕으로 조성되니, 광릉(光陵)의 전례를 따라 정자각(丁字閣)을 두 능침의 중심으로 옮겨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장경왕후와 중종의 능침이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마련되었으며 희릉에서 정릉으로 능호를 바꾸었다.
1545년 7월 1일에 인종이 승하하면서 "부왕의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병을 얻어 효를 다하지 못했으니 자신을 부모 곁에 묻어 달라."는 유교(遺敎)를 남겼다. 정릉의 서쪽 산자락 너머에 인종의 효릉(孝陵)을 건립하여 정릉과 효릉이 하나의 능역을 이루었다.
그러나 1559년(명종 14)년 4월에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풍수가 나쁘다는 이유로 중종의 능을 천릉할 뜻을 밝혔다. 당시 대신들은 천릉을 주저하였으며, 문정왕후가 승려 보우와 결탁하고 사후에 중종의 능 곁에 묻히고자 하는 의도에서 계획된 것이라 여기기도 하였다. 새 능의 자리로 정한 곳은 문정왕후가 신임하던 승려 보우가 주지로 있던 봉은사가 있는 선릉(宣陵)의 동쪽 언덕이었다. 1562년 9월 4일에 선릉의 동쪽 언덕으로 천릉하였다.
새로 정한 능역은 침수가 자주 일어났다. 『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정자각 앞이 지세가 낮아 장마가 질 때마다 강물이 넘쳐 섬돌 밑까지 들어오니 재실(齋室)에서 배를 타고 왕래하였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결국, 문정왕후는 정릉 곁에 자신의 능침을 마련하고 싶었으나, 새로 길지를 택하여 오늘날 태릉(泰陵)을 조성하였다.
1755년 2월에 표석을 세우면서 비각(碑刻)을 건립하였다. 1970년 5월에 선릉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에 조선왕릉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이전에 기록된 『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가 모두 사라져 없어진 상황에서 1601년에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1600)의 산릉을 만들어야 하였다. 참고할 전례가 없어 혼란스러웠으나 『정릉개장의궤(靖陵改葬儀軌)』가 당시에 남아 있어 현궁을 조성하는 데 참고가 되었다. 『정릉개장의궤』는 1562년에 정릉을 천릉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