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서울 출신. 정선군수 한승원(韓承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추원경력 한여필(韓汝弼)이고, 아버지는 경성판관 한효윤(韓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인조의 장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 · 진사시에 합격, 1585년 태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예문관검열이 되어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주서 · 봉교 · 전적 등을 거쳐, 1589년 금천현감(衿川縣監)이 되었다. 마침 선조가 그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였다. 그 해 겨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발각되자,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한 일로 연좌되어 투옥되었다. 그 뒤 수개월 만에 풀려나 원주로 이사하였다.
1592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강원도도사 · 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원주목사가 되어 거처 없이 돌아다니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 1595년 지평 · 필선 · 정언 · 교리 등을 역임하고,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어 검상 · 사인 · 부응교 · 사간 · 집의 등을 역임했다.
1597년 좌부승지에 올라 명나라 도독 마귀(麻貴)를 도와 마초와 함께 병량의 보급에 힘썼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우승지 · 경기감사 · 대사성 등을 거쳐, 다음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의 알력으로 파직당하였다.
다음해 병조참판을 거쳐,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605년 호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그 뒤 대사헌 · 한성부판윤 및 평안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특히,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소학』 · 『가례』 등의 책을 간행, 보급해 학문을 진흥시켰다.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전리방귀(田里放歸)되고, 1617년 충주에 부처되었으며, 1621년 여주에 이배(移配)되었다. 그 해 오랑캐 침입의 조짐이 보이자 이에 대비할 적임자로 뽑혀 유배지에서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오도도원수가 되어 국경수비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그의 딸이 인열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자 영돈녕부사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공주에 피난한 왕을 호종하였다. 그 뒤 겸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로 『광해군일기』 편찬에 참여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자를 전주에 시종하였다.
예학(禮學)과 국가의 고사(故事)에 밝았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유천유고(柳川遺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