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리고분은 1988년 12월 21일에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2008년 10월 7일부터 11월 25일까지 50일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였다. 이 고분은 삼산천(三山川) 주변에 형성된 해발 32m의 낮은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다. 구릉 일대가 개간되면서 분구가 상당부분 깎여 나갔으며 현재 남은 길이는 40m 정도이다.
고분의 장축은 북동-남서 방향이며, 평면형태는 장고형으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원형부는 북동, 방형부는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전체 길이는 41.3m이며, 원형부는 지름 24.3m, 높이 5.2m, 방형부는 전단 길이 17.5m, 높이 3.8m이고 연결부는 너비 15.3m, 높이 3.5m이다.
매장주체 시설은 원형부 중앙부에서 지상식의 굴식돌방〔橫穴式石室〕1기가 확인되었으며 장축은 북동-남서향이다. 분구에서 이음돌시설, 기저부에서 평면형태를 따라 웅덩이 모양으로 파낸 도랑〔周溝〕이 조사되었다.
구지표면 위에 녹갈색 계통의 점성이 강한 사질점토를 안쪽으로 비스듬히 쌓아 분구를 만들고 그 내부는 적갈색 계통의 사질토를 반복하여 채우는 방식으로 층위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이음돌시설은 분구 중단부터 윗부분에 깬돌을 덮어 의장 효과를 낸 것으로 서쪽은 약 18m 규모로 잘 남아 있으나 동쪽은 허리부, 북쪽은 원형부 일부에서 조사되었다. 이음돌 최하단은 장대석을 사용하였고 분구를 쌓으면서 동시에 축조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돌방은 구지표에서 1m 이상 성토하고 그 위에 축조된 지상식이며 분구를 쌓으면서 동시에 만들었다. 돌방 입구의 널길 구덩이는 장타원형이며 규모는 길이 420㎝, 너비 260㎝다. 널길은 평면 형태가 ‘팔(八)’자형으로 돌방 입구에서부터 바라지며 길이는 150㎝로 장대석과 깬돌으로 쌓았다.
돌방 입구는 판석을 문주석 겸 벽석으로 활용하고 일부는 깬돌을 좁혀 쌓았으며 규모는 높이 127㎝, 너비 30∼60㎝다. 문지방석은 작은 판석이며 미석은 장대석을 사용하였다. 널길에서는 폐쇄석으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깬돌이 약간 확인되었다.
널방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고 규모는 길이 316∼348㎝, 너비 217∼238㎝, 최대 높이 180㎝이다. 바닥에는 길이 313㎝, 너비 212㎝의 대형 판석 1장을 놓고 남은 공간에는 작은 판석과 깬돌을 깔고 황백색 점토로 마감하여 수평을 맞추었다. 널방의 벽석은 장벽을 좁힌 형식이며 하단부에는 장대석을 놓고 그 윗부분에 황백색 점토를 채워가며 5∼11단 정도의 깬돌을 쌓았다.
도랑은 봉분의 외곽을 따라 웅덩이 모양으로 파낸 부정형이며 지상에서 도랑을 거치지 않고 분구로 올라갈 수 있는 연결부는 총 6개로 추정된다. 도랑 내에서는 이음돌 부분이 훼손되면서 굴러 떨어진 깬돌과 토기편들이 약간 출토되었다. 고분은 수차례의 도굴로 인하여 출토된 유물의 종류나 수량이 적은 편이다. 널방 내부에서는 바리모양그릇받침·뚜껑접시·큰항아리·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 등 토기편과 옥, 철기류가 수습되었다. 옥은 곱은옥·대롱옥·구슬옥·작은옥·금박유리옥 등 다양하며 철기류는 큰칼조각·쇠화살촉·쇠손칼·화살통부속구·띠꾸미개 등이 출토되었다.
용두리고분의 축조시기는 함평 신덕고분, 광주 명화동고분 등에서 출토된 유물과의 비교, 돌방구조와 이음돌시설 등으로 판단할 때 6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특히 널방 내부에서는 토기 및 철기가 윗부분부터 바닥부분까지 모두 파편으로 깨어져 정형성 없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널방 축조 후 뚜껑돌 상면에서 제사의례를 행한 후 깨뜨려서 매납한 것이 뚜껑돌이 제거되면서 돌방 내부에 함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두리고분은 장고형고분으로서는 작은 편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장고형고분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겉모습이 장고형(전방후원형)이라는 점과 이음돌시설의 존재로 보아 백제와 왜의 교류 관련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