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관(史官)이 된 뒤 승문권지(承文權知) · 예문관검열 · 봉교 등을 거쳐 시강원설서에 제수되었다. 1561년 호조 ·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해미 현감으로 나갔다가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 1565년 헌납 겸 지제교 · 부수찬 등을 거쳐 지평을 지냈다. 당시 세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명종이 병이 나자, 훌륭한 선비를 뽑아 종실을 가르칠 것을 청하였다.
1580년(선조 13) 진주목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승지에 올랐으며,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이 되어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책봉되면서 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판서 ·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해 관동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으로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 때 왜장 가토(加藤淸正)로부터 선조에게 보내는 항복 권유문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그의 손자와 왕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자 아들 황혁(黃赫)이 대신 썼다. 한편, 항복 권유문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하나의 글을 썼으나 선조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왜군이 부산으로 철수할 때 석방되었다. 그러나 항복 권유문을 기초한 문제가 동인 · 서인 간의 정치쟁점이 되면서, 이후 정권을 장악한 동인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길주에 유배되었다. 1597년 왕의 특명으로 석방되었으나, 복관되지 못한 채 죽었다.
문장 · 시 · 서예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지천집』이 있다. 1623년(인조 1)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