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장렬왕후
소재지
경기도 구리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내용 요약

휘릉(徽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1688년에 건원릉의 서남쪽에 유좌묘향으로 자리 잡았다. 정자각의 정전 좌우에 익각을 갖추어 5칸이며, 배위청이 3칸으로 8칸 정자각에 맞배지붕으로 남아 있다. 건원릉, 현릉, 목릉, 숭릉, 원릉, 경릉, 수릉, 혜릉 등과 함께 동구릉이라 불리며, 1970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정의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
건립 경위

1688년(숙종 14) 8월 26일에 장렬왕후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세상을 떠났다. 9월 초5일부터 산릉의 터를 모색하여 파주 장릉(長陵), 순릉(順陵)의 경내, 고양의 희릉(禧陵)익릉(翼陵)의 경내 등이 거론되었으며, 남양주 광릉(光陵)건원릉(健元陵) 경내까지 추가로 간심하였다.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의 하교에 따라 건원릉 국내 주1의 자리를 간심하니, 경주부윤 신경윤(愼景尹)이 “국가 제일의 능침”이라 극찬하여 9월 22일에 최종 결정되었다. 12월 초6일에 주2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12월 16일에 국장이 이루어졌다.

변천

1762년에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가 휘릉(徽陵)을 봉심하니 정자각의 기둥 밑이 썩은 것을 발견하고 수리하도록 명하였으며, 1793년(정조 17)에 다시 한번 수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897년에는 5월 20일 새벽에 일어난 화재로 인하여 정자각이 소실되자, 중건청(重建廳)을 설치하여 새로 건립하였다.

중건청 제조였던 조정희(趙定熙)가 정자각의 규모가 일반적으로 5칸인데, 휘릉은 이보다 많다고 아뢰니,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이 답하기를 “각 능의 정자각은 5칸이지만, 숭릉(崇陵)과 휘릉만은 정전(正殿)의 좌우에 반 칸의 퇴가 있고 배위청(配位廳)에도 1칸이 더 있어 8칸 규모이니, 본래 규모대로 중건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중건한 8칸 정자각이 현재까지 유지되었다.

형태와 특징

현궁은 석회와 모래 · 황토를 비율대로 섞어 반죽하여 주3으로 만들었다. 봉릉에는 주4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 둘렀다. 능상은 주5을 놓아 단을 구분하였으며, 후면에는 주6으로 감쌌다.

상계(上階)에는 봉분이 있고 주위에 주7주8을 각 4개씩 교차하여 배치하고, 정면에는 혼유석을 중심에 두고 양쪽에 망주석을 세웠다. 중계(中階)에는 장명등을 중심에 두고 주9주10를 1쌍씩 마주 보도록 배치하고, 하계(下階)에는 주11과 석마(石馬) 1쌍씩을 배치하였으나, 하계의 경계를 이루는 계체석은 생략하였다.

1788년에 기록된 『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정자각 오른쪽으로 28보 지점에 수라청(水刺廳)이 있으며 왼쪽으로 28보 지점에 수복방(守僕房)이 있다고 하였으나, 모두 소실되었고 수복방의 기단과 초석만 남아 있다.

의의 및 평가

정자각은 정전 3칸에 좌우 주12을 갖추어 5칸이며, 배위청은 3칸으로 총 8칸 규모이다.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정자각 제도를 5칸으로 규정하면서 이후의 정자각은 5칸으로 획일화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8칸 규모의 정자각이 꾸준히 건립되었고, 1674년 숭릉을 건립하면서 조선 후기에도 8칸 정자각이 재등장하였다. 그러나 지붕의 추녀부가 쉽게 썩어 보수하는 과정에서 6칸 혹은 5칸으로 변화되어 그 사례가 많지 않다. 휘릉은 8칸 규모에 맞배지붕으로 건립된 정자각의 사례를 보여 준다.

참고문헌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Ⅴ』(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논문

신지혜, 「조선후기 영악전 기능수용에 따른 정자각 평면변화 고찰」(『건축역사연구』 v.18 n.4(통권 65호), 2009)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https://royaltombs.cha.go.kr/)
위키실록사전(http://dh.aks.ac.kr/sillokwiki)
주석
주1

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유방(酉方)을 등지고 묘방(卯方)을 바라보는 방향.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우리말샘

주2

임금의 관(棺)을 묻던 광중(壙中).    우리말샘

주3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    우리말샘

주4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5

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    우리말샘

주6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주7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8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9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10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11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12

궁중 안 정당 좌우편에 딸려 있는 전각.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신지혜(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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