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의 주석본 중에는 송나라 정원(淨源)이 『화엄경』 본문을 과문(科文)하고 여기에 당나라 징관(澄觀)이 펴낸 『화엄경소(華嚴經疏)』 60권을 덧붙인 『화엄경소(華嚴經疏)』 120권이 있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 갔을 때 이 정원의 주석본을 판각(板刻)하도록 의뢰하였다. 이때 판각된 정원의 주석본은 송나라 상인에 의해서 고려에 전달되었다. 이후 고려에서 유통되었던 목판본 『화엄경』은 바로 이 정원의 주석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었다. 『화엄경』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황해도 귀진사(歸進寺)에서 간행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기도 용복사(龍腹寺)와 전라도 송광사(松廣寺)에서 각각 간행되었다. 부천(富川) 만불선원(萬佛禪院)에 소장되어 있는 『화엄경언해(華嚴經諺解)』는 권수제가 “대방광화엄경소”라 적혀 있어 이들 판본 중 하나를 저본(底本)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부천 만불선원에 소장되어 있는 『화엄경언해』 38권 39책은 『화엄경』 경문의 한자음을 한글로 표기하고 한글로 토를 단 한글 음역본 『화엄경』이다.
『화엄경언해』는 권수(卷首)의 ‘대방광불화엄경소’라는 서명과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120권으로 구성된 『화엄경소』를 저본으로 한 일종의 사경이다. 주소(註疏)를 제외한 경문만을 한글로 음독(音讀)하고 여기에 한글로 현토(懸吐)를 달아 정성스럽게 쓴 한글 사경(寫經)이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도 불리는 『화엄경』의 핵심 사상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원융사상이다. 이 경전은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화엄종의 근본 경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화엄경』은 『법화경』 · 『금강경』과 함께 한국의 불교 사상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대승 경전이다. 『화엄경』에 대한 주소본은 화엄학의 대가인 당나라 징관(澄觀)이 주본 『화엄경』 80권본을 저본으로 찬술한 『화엄경소(華嚴經疏)』 60권본, 송나라 정원(淨源)이 『화엄경』의 본문을 따라 과문(科文)하고 거기에 징관의 『화엄경소』를 덧붙인 『화엄경소(華嚴經疏)』 120권본이 있다. 1087년(고려, 선종 4)에 대각국사 의천이 의뢰하여 송나라 상인 서전(徐戩) 등이 고려에 전달한 목판본 『화엄경』은 바로 이 정원의 주소본을 판각한 것이다. 이후 이 송판(宋板)은 필요에 따라 수차례 인쇄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조선시대 세조 연간에는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이 간경도감에서 중수 · 간행되었다. 이후 『화엄경』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황해도 귀진사에서 간행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기도 용복사와 전라도 송광사에서 각각 간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화엄경』 또는 『화엄경소』가 언해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어 언해본의 유무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 한글본 화엄경인 『화엄경언해』는 창덕궁의 상궁과 궁녀들이 중심이 되어 사경한 것이므로 불교를 믿던 궁녀들이 화엄경 본문과 구결을 한글로 정서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정원의 『화엄경소』는 전체 120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한글본은 경문과 구결을 한글로 필사하여 39책으로 꾸몄다. 권말(卷末)에 '왕실의 평안과 전하의 수복를 축원하기 위해 창덕궁의 궁녀들이 한글로 정성스럽게 정서한 사경이니 널리 독송(讀誦)하기'를 권하고 있다. 책의 끝에는 ‘광무갑진칠월일등서’라는 사성기가 있어 이 책이 1904년(광무 8)에 사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천 만불선원에 소장되어 있는 『화엄경언해』는 80권의 주본 『화엄경』 전체를 한글로 음역하고 구결을 현토한 사경이다. 이 책은 1928년 백용성(白龍城)이 『조선글화엄경』을 번역하고 발행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