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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開港場)

근대사제도

 외국인의 내왕과 무역을 위해 개방한 제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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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개항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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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의 내왕과 무역을 위해 개방한 제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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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외국인의 정박·접대·무역처로서의 기능을 발휘한 항구를 통칭한다. 근대 이후 국제조약에 따라 개방된 항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외국인 거류지가 설정되고 감리서(監理署)가 설치되었으며, 또한 외교관이 주재하고 출입외화(出入外貨)의 관세 수입처가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개항장은 그 이전 고대부터 존재했지만, 기록이 유실되어 대체적으로 장소와 규정 정도만 대체적으로 알 수 있는 정도이다. 고려 때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碧灡渡)는 일찍부터 송나라와 일본 상인을 비롯하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내왕한 국제 무역항으로 꼬레(Coree)라는 이름을 서양에까지 알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왜와의 관계상 개항장이 필요하여, 1407년(태종 7)에 경상도병마절제사 강사덕(姜思德)의 건의에 따라, 경상좌·우도의 도만호(都萬戶) 주둔지인 부산포(富山浦 : 지금의 부산)·제포(薺浦 : 지금의 乃而浦)를 개항하여 왜인의 입국을 허용하였다.
그런데 내왕왜인(來往倭人)과 항거왜인(恒居倭人)이 격증하여 세사미(歲賜米)의 증액, 왜인 거류지의 확대 등의 요구가 일어났다. 그래서 조선은 1418년염포(鹽浦 : 지금의 울산)와 가배량(加背梁 :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까지 개항하여 개항장은 4개소로 증가하였다.
그 뒤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로 일시 폐쇄되었다가, 1424년 부산포와 내이포, 1427년 염포 등 삼포를 개항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포에는 왜관을 두어 교역 및 사신 접대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15세기 중엽 이후 삼포에는 거류 왜인이 급증하고 사무역이 성행하면서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이후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이 일어날 때까지, 개항장은 폐쇄 또는 축소되는 변화를 반복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후 국교를 재개한 1609년(광해군 1)의 임신약조로 부산포를 개항하여 19세기 전반까지 존속시켰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및 변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아메리카제국의 문호 개방 요구가 한층 증대되었다. 1832년(순조 32) 6월 영국 상선이 충청도의 몽금포에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며, 1845년(헌종 11) 다도해 수역을 측량하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1846년 프랑스 군함이 충청도 해안에 나타났으며, 1861년(철종 12) 러시아 함대는 원산항 개항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독일인 오페르트(Oppert,E.J.)의 3차에 걸친 통상 요구,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통상 요구, 2차에 걸친 프랑스 군함의 내침 등이 있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가 있었으나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좌절되었다. 국내의 개국 분위기의 성숙과 일본의 요구에 의해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876년 부산, 1879년 원산, 1880년 인천 등 3개 항구를 열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개항을 선두로 다른 서구와의 문호도 개방하였다.
먼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조중상민무역장정(朝中商民貿易章程), 1883년 조영(朝英)·조독수호통상조약(朝獨修好通商條約), 1884년 조이(朝伊)·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등을 체결하여 세계 시장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수공업적 생산 양식의 단계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조선은 유럽·아메리카제국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운영
한편, 항구가 아닌 내륙에도 외국인의 거주를 위해 개시장(開市場)·개방지(開放地)·잡거지(雜居地) 등이 설정되었다. 개시장은 거류지 이외의 지역에서 외국인에게 상업 행위를 허용한 곳이다.
국경 지방인 회령·경흥 등은 조청(朝淸)·조로(朝露)의 육로통상조약과 길림여조선상민수시무역장정(吉林與朝鮮商民隨時貿易章程)에 의해 교역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내륙 지방으로는 평양·의주·용암포·용산·양화진(楊花津) 등이 해당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개시장도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인의 거류가 허용되었다.
개방지는 인천 월자유롭게 거주, 활동하게 한 곳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군사 목적으로 활용되거나 조차지로 되었다. 잡거지는 개시장과 성격이 비슷하여 외국인의 거류와 상업 활동을 허용하였다.
평양·성진·군산·마산 등의 개항장은 1898년 일본·청나라·러시아 등의 외세의 강세에 따라 설정되었다. 미곡을 비롯한 문물·금·은 등이 유출되고 관세 수입처 및 외국인 거류지가 되었다. 그러나 외국인 거류지도 국가에 따라서 각기 성격이 달랐다.
특히, 청나라와 일본은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인 단독 거류지를 설정하였다. 이 밖에 각국 공동 거류지 또는 각국 거류지라는 일반 외국인 거류지가 설정되어, 외국인 상호간의 유대 강화를 위해 각국 거류지회인 일반외국인거류지회가 있었다.
일본인은 그들의 친목 도모를 위해 일본인회와 일본인거류민회를 조직하였다. 1906년부터 재한 일본인은 통감부의 지시에 따라 개항장을 중심으로 11개소의 일본인거류민단을 조직하였다. 개항장에는 감리서·개항시장경무서·개항시장재판소를, 국경지방의 개시장에는 변계(邊界)경찰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개항장의 최고 행정권자는 감리였다. 감리가 주재하지 않는 곳은 부사(府使)나 군수가 그 직권을 행사하였다. 감리는 부사직이나 군수직을 겸하였고 개항시장 내의 모든 섭외 사무를 담당하였다. 섭외 사무는 지방 제도에 따른 행정 조직 체계의 상하 관계를 떠나 동등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감리는 부사보다 상위에서 개항장 내를 감리, 관리하였으며, 총책임을 지고 사무를 추진하였다. 개항장 내에는 지역에 따라 각국의 영사관도 주차(駐箚)하였다. 그런데 개항시장 어느 곳이나 영사관이 주재한 것은 아니다.
대체로 영사 사무관계가 비교적 많은 곳에서 영사관이 주재하며 자국의 권익확보·보호에 주력하여 각국이 대립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인천항의 세력 확장 과정에 나타난 대립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주로 개항장에 주재한 영사와 거류지 내의 조직체인 각국 거류지회 임원 간에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표출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개항장은 인종 전시장이고 외국 선박의 정박처이며 외국 상품의 진열장인 동시에 유행에도 민감하였다. 또한, 외국어의 혼합장이었으며, 풍속 변화와 각국 복장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외세 침투와 침략의 발판 구실을 하였다. 또한 치외법권지역이기도 하였으며 외형상으로는 근대화의 시발지였다.
그러나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하여 고유의 미풍 양속을 저해하기도 하였다. 관제 수입처의 구실과 함께 도시화를 촉진시켰으나, 우리의 중요한 생활 필수품·귀금속·문화재가 반출되었으며, 외국인과의 관계 때문에 행정상 특수 지역으로 지방 제도의 개편에 따라 근대 도시로 등장하였다. 1906년 10월 감리서가 폐지될 때까지 대외 관계 사무의 창구 구실을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편년록(編年錄)』(내각편록과조선편,1895∼1896)

  • 『한국개항장연구(韓國開港場硏究)』(이현종,일조각,1975)

  • 『조선전기대일교섭사연구(朝鮮前期對日交涉史硏究)』(이현종,한국연구원,1964)

  • 『현행대한법규류찬(現行大韓法規類纂)』(정부재정고문부편찬,규장각도서칙령(奎章閣圖書勅令) 제17호·제47호)

  • 「한국(韓國)의 개항장(開港場)에 관한 회귀분석적(回歸分析的) 연구(硏究)」(박성호,『인천교육대학논문집(仁川敎育大學論文集)』 7-1,1975)

  • 관보(官報)

  • 「近代朝鮮に於ける開港の硏究」(田保橋潔,『小田記念朝鮮論集』,1934)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이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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