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조선 8대 예종의 왕후인 장순왕후 청주한씨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장순왕후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봉일천리)
내용 요약

공릉(恭陵)은 조선 8대 예종의 왕후인 장순왕후 청주한씨의 능이다. 장순왕후가 세자빈 시절 승하해 세자빈묘로 조성되었으며, 석실을 사용하고 난간석과 병풍석은 제작하지 않았다. 공릉으로 봉릉된 뒤에도 추가로 석물을 제작하지 않아 15세기 세자빈묘의 체제를 잘 유지하고 있다. 공릉은 사적으로 지정된 파주 삼릉(坡州 三陵) 중 가장 먼저 조성된 능이다.

정의
조선 8대 예종의 왕후인 장순왕후 청주한씨의 능.
건립경위

장순왕후(章順王后)는 1460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이듬해인 1461년 11월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고 12월 산후병으로 승하하였다. 이때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상장(喪葬)은 현덕빈(顯德嬪, 문종현덕왕후)의 예에 의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공릉은 맨 처음 세자빈묘로 조성되었으며, 세조(世祖)의 명으로 주1을 사용하고, 주2과 난간석은 사용하지 않았다. 파주의 보시동(普施洞) 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현재의 위치이다. 성종 즉위 이듬해인 1470년에 장순빈은 휘인소덕 장순왕후(徽仁昭德 章順王后), 능호는 공릉(恭陵)으로 추숭되었다.

변천

공릉과 경릉은 1470년 함께 봉릉(封陵)되었는데,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능(陵) 위에는 마땅히 의물(儀物)을 갖추어야 할 것인데, 다만 생각하건대, 주3는 고요한 것을 숭상한다. 두 능(陵)은 안치(安置)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동요(動搖)시킬 수가 없으니, 그 의상(儀象)의 잡물(雜物)은 가설(加設)하지 말라.”라는 명으로 더 이상의 석물을 추가하지 않았다.

형태와 특징

공릉은 봉분 주변에 주4주5이 1쌍씩 배치되어 있으며, 봉분 앞에 주6장명등, 주7과 마석이 배치되어 있다. 세자묘로 조성된 덕종 경릉과 동일하게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덕종 경릉과 장순왕후 공릉은 석물의 수량뿐만 아니라 석실을 사용한 점도 같다.

능강 아래에는 주8주9이 있으며, 수라간은 남아 있지 않다. 재실은 파주 삼릉 입구에 남아 있으며, 재실 근처에 있던 전사청, 주10, 안향청 등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금석문

비각 내부에 있는 표석은 1817년에 공혜왕후 순릉 표석과 함께 건립되었으며, 앞면의 전서(篆書)박윤수(朴崙壽), 뒷면의 주11는 김시근(金蓍根)이 쓴 것이다.

의의 및 평가

공릉은 가장 먼저 세자빈묘로 조성되었으며, 봉릉 뒤 석물이 추가되지 않아 이후 세자빈묘의 전거가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춘관통고(春官通考)』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Ⅱ』(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주석
주1

고분 안의 돌로 된 방.    우리말샘

주2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3

‘귀신’을 높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4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5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6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7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8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9

비를 세우고 비바람 따위를 막기 위하여 그 위를 덮어 지은 집.    우리말샘

주10

제사 때에 쓰는 그릇, 기구 따위를 넣어 두는 창고.    우리말샘

주11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우리말샘

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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