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후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좌정승, 우정승, 상락후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온재(穩齋)
시호
정간(貞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292년(충렬왕 18)
사망 연도
1361년(공민왕 10)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좌정승|우정승|상락후
관련 사건
조적의 난|심양왕 고의 모반
정의
고려 후기에, 좌정승, 우정승, 상락후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온재(穩齋). 할아버지는 김방경(金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김순(金恂)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25년(충숙왕 12) 7월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일이 있었는데, 지평으로서 장령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불화를 바쳤다. 또한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해 중서성에 올릴 때도 원나라에 갔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6월 조적(曺頔)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왕을 시종한 공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전(田) 100결과 노비 10구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끝까지 남아 있다가 창에 맞기도 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10월 찬성사가 되었다. 1345년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352년(공민왕 1)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서연(書筵)에 입시해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356년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해 원나라에 갔다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집필자
박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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