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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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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과 그 부산물을 얻기 위하여 벼를 재배하는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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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쌀과 그 부산물을 얻기 위하여 벼를 재배하는 농업.
영역닫기영역열기벼의 기원과 분포
인류가 재배하고 있는 벼는 식물학적으로 벼과(科)의 벼속(屬)에 들어가는 2개 종(種)이 있다. 그 하나는 히말라야산맥 남방의 산록에서 발생한 것으로 학명을 Oryza sativa L.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의 나이저 강 상류 델타지대에서 발생한 것으로 학명을 Oryza glaberrima L.라고 한다.
동양에서 재배되고 있는 벼는 오리자 사티바 린네이며, 이는 형태적·생리적 특성 등 세 가지 군(群)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중국 및 극동에서 재배되고 알이 비교적 둥근 갱도(秔稻, Japonica)와 동남아시아 및 인도 등지에서 재배되고 알이 긴 인디카(Indica),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고지대에서 재배되는 부루(Bulu)이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재배되고 있는 품종군은 갱도에 속하며 이에는 논벼와 밭벼가 있다.
벼는 오랫동안의 선발과 전파과정(傳播過程)을 거쳐 세계적으로 100개 이상의 국가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그 분포를 보면 북위 53°에서 남위 35°까지 재배되고 있어 지구상에서는 매일 어디에선가는 익어 가는 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1986년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통계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벼를 재배하는 면적은 1억4494만㏊이고, ㏊당 평균 수량은 3,286㎏이며, 생산고는 4억7630만2천M/T에 이르고 있다.
생육기간도 90일에서 최장 330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품종이 있으며, 연중 언제 파종해도 수확시기가 거의 일정한 품종으로부터 동일 포장에서 일 년에 네 번 경작할 수 있는 품종들이 있는가 하면, 구릉지에 재배하는 밭벼[陸稻, 山稻]와 배를 타고 다니며 이삭을 거두는 부도(浮稻)에 이르기까지 재배법에도 변이가 많아 벼의 재배면적과 수확고는 계속 증가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
우리나라의 벼농사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륙을 거쳐 전래되었다고 하는 북방설과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해로를 타고 한반도 중부에 전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중국 강남에서 남해안지방을 기점으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설과 북방설 및 남방설의 절충설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벼농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 위지(魏志) 변진조(弁辰條)에 “변진국들은 오곡과 벼재배에 알맞다(宜種五穀及稻).”라고 씌어 있다.
또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에 “다루왕 6년(33) 2월 영을 내려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에 벼농사를 시작하게 하였다(多婁王六年二月下令 國南州郡 始作稻田).”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1세기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이 서기전 1세기경이라는 사실(安滕, 日本古代稻作史雜考, 1951)에 비추어 과거 중국 문화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전파과정으로 보아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은 적어도 서기전 1세기 이전으로 보아야 타당하다는 설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로 경기도 여주시 흔암리에서 서기전 6,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탄화미(炭化米)가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록상으로는 신라본기에 “남해왕 13년(16) 7월 멸구[蝗]의 피해로 백성이 굶주려 창고를 열어 구하였다(七月蝗民飢發倉廩救之).”는 기록과 고구려본기에 “태조 3년(55) 8월, 나라의 남쪽에 멸구가 곡식을 해쳤다(國南蝗害穀).”는 기록들이 있다.
멸구는 벼식물에만 서식하며 지금도 매년 중국에서 기류를 타고 날아와 우리나라 벼농사에 큰 피해를 주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월동이 안 되는 곤충이므로 이들의 피해가 민생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면 벼는 적어도 서기전 1세기 이전부터 많이 재배되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330년에는 논벼 재배를 위한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의 저수지인 벽골지(碧骨池)를 축조한 것으로 보아 4세기경에는 남쪽에도 벼농사가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때의 벼농사 작부방식(作付方式)은 지력 유지로나 호당 경지규모로 보아 대체로 1년 또는 2년 만에 재배되는 휴한농법(休閑農法)이 관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농무도감(農務都監)·전농사(典農司) 등의 권농관(勸農官)을 두는 한편, 1363년(공민왕 12)에는 제학(提學) 백문보(白文寶)가 수차(水車) 보급을 건의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벼농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재배면적이 증가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시대의 벼농사
고려 말 이전의 벼농사에 대한 기록은 당시의 우리나라 농서(農書)가 없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없다. 우리나라는 조선 초기까지 중국의 『범승지서 氾勝之書』·『제민요술 齊民要術』·『사시찬요 四時纂要』·『농상집요 農桑輯要』 등의 농서를 수입하거나 『사시찬요』·『농상집요』 등에서 보는 것처럼 이를 국내에서 복간하여 이용해 왔다.
따라서 고려 말 이전의 우리나라 벼농사가 어떻게 독자적으로 이루어져 왔는가 하는 기술적 내용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벼재배법은 1429년(세종 11)에 편찬된 『농사직설 農事直說』 종도조(種稻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농사직설』의 벼농사에 대한 기술적인 풀이를 보면, 원리면에서 오늘날의 재배법과 큰 차이가 없다. 예컨대, 씨앗 준비는 씨앗을 물에 담가 뜨는 것을 제거하고 건실한 것만을 골라 잘 말려두었다가 사용한다거나, 논에 가을갈이·봄갈이·객토(客土)·유기질비료 시용·볍씨 싹틔우기·모내기·중경제초 등의 각종 기술이 그러하다. 다만 오늘날과 크게 다른 것은 벼재배를 대부분 직파재배(直播栽培)로 했다는 점이다.
직파에는 물이 있는 상태에서 온 논에 직파하는 수경(水耕, 水沙彌)과 마른 상태에서 직파했다가 우기(雨期)에 물을 넣는 건경(乾耕, 乾沙彌)의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육묘이앙법[揷秧, 苗種]도 일부 있었으나, 이 방법의 풀이 말미에 “만일 큰 가뭄이 들면 실수하게 되어 농가로서는 크게 위험한 일이라(萬一大旱則失手農家之危事也).”고 경고까지 한 것을 보면, 모내기법은 수리조건이 좋은 곳에 한정시켜 재배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 이앙법의 경우 『농사직설』에는 한 그루의 묘(苗) 수를 4, 5본(本)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보다 226년 뒤인 1655년(효종 6)에 편찬된 『농가집성 農家集成』에는 3, 4본으로 되어 있어 최신 기술에서 말하는 소주밀식이앙(小株密植移秧)의 원리는 이미 17세기 중엽에 우리의 선인들에 의해 개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농사직설』이 편찬된 15세기의 벼품종은 ‘도종심다(稻種甚多)’라는 기록으로 보아 여러 품종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며, 더욱이 1492년(성종 23)에 간행된 강희맹(姜希孟)의 『금양잡록 衿陽雜錄』 곡품조(穀品條)를 보면 모두 27개의 품종에 관한 특성이 설명되어 있어 15세기에 이미 많은 품종의 분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양잡록』의 벼품종을 대별하면, 숙기에 따라 올벼 및 중생벼·늦벼가 있고 논벼와 밭벼, 그리고 메벼와 찰벼 등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벼품종은 재배기술이 개선되고 재배면적이 늘면서 품종 수도 계속 증가되고 있다.
15세기의 27품종 이래 1700년(숙종 26)경에 편찬된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 山林經濟』에는 34품종, 1798년(정조 22)부터 1799년 사이에 편찬된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 海東農書』에는 37품종, 1842년(헌종 8)부터 1845년 사이에 편찬된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곡명고(穀名攷)에는 68품종으로 시대가 발전될수록 품종 수도 증가되고 있다.
밭벼의 재배법은 『농사직설』에 밭벼 단작(單作)의 기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혼작(混作)도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밭벼 2, 피[稷] 2, 팥[小豆] 1의 비율로 섞어 혼파하는 양식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벼농사가 밭벼로 시작되었느냐, 논벼로 시작되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벼의 도입 경로로 북방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밭벼가 먼저라고 하고, 중부 및 남방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논벼가 먼저라고 하나 아직 정설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
『농사직설』의 기록에 논벼를 우선적으로 기록한 점, 밭벼는 벼재배의 9분의 1 분량으로 간략하게 기록한 점과 『금양잡록』의 벼품종에서도 밭벼는 2품종밖에 소개되지 않을 정도로 품종 수가 적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에는 논벼의 직파가 압도적이었으며 밭벼 재배는 극히 제한되었던 것 같다.
논의 이용은 15세기까지만 해도 벼 단작으로 이용되어 오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이모작형태로 논에 보리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 같다.
왜냐하면, 허균(許筠)은 1610년(광해군 2)에 전라도 익산군 함열읍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인근의 농법을 참고로 『한정록 閑情錄』 을 엮은 바 있는데, 이 책의 치농조(治農條)에 논보리 재배에 관한 기록이 처음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보리 재배는 1610년 이전인 어느 시기부터 겨울철 기후가 온난한 남쪽을 기점으로 재배가 시작되어 서서히 북상해 오다가 17세기까지는 전라북도지방까지만 북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까닭은 『한정록』보다 약 45년 뒤인 1655년에 공주목사 신속(申洬)이 편찬한 『농가집성』에는 논보리 재배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는 1610년에 전라도 익산에서 재배되던 논보리가 1655년까지도 충청도 공주지방까지는 북상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이 논의 보리 이모작은 제초관리(除草管理)에 편리하고 식량 증산을 가져오기는 하나 논보리를 재배하면 보리의 성숙기와 벼모의 생육기 등 두 작물의 경합으로 벼의 직파 재배가 어려워 불가피하게 이앙 재배면적의 확대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은 이앙 재배면적의 증가는 수리조건이 불안정한 한계지까지 파급되어 결국 한해를 자주 입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이연(李筵)은 이앙 재배하는 자를 처벌하자고 하였으며, 1838년 이지연(李止淵)은 상주하여 이앙하는 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뒤 조정에서는 한때 묘종(苗種, 移秧)이라는 용어마저 쓰지 못하였다고 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일제강점기의 벼농사
민족항일기의 벼농사는 주로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일본의 식민이 시작된 20세기 초부터 일본에 경제공황이 왔던 1930년경까지이고, 제2기는 이때부터 중일전쟁을 일으켰던 1938년경까지이며, 제3기는 그 뒤 일제 말기까지이다.
제1기에는 15만 호의 일인 농가들을 우리나라에 이식하여 쌀을 증산하여 일본으로 들여가려 하였고, 제2기에는 일본 내의 경제공황과 쌀 과잉으로 한국의 쌀생산을 억제하려 하였으며, 제3기에는 제2차세계대전으로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증산을 꾀하던 시기였다.
1906년 수원에 권업모범장(지금의 농촌진흥청의 전신)을 설치하고, 그 뒤 일본에서 선발된 벼품종을 들여다가 비교시험하여 수량이 많은 품종들을 전국에 보급시켰다.
1907년에는 권업모범장에서 재래종 5품종(米租·趙同知·豆稻·海南稻·精根租)의 수량을 시험하였는데, 10a당 평균 2.81석(石)에 대해 일본에서 들여온 5품종(農場の光·早神力·石白·日出·近江)의 평균은 10a당 4.22석으로 재래종에 비하여 월등히 수량이 많았다.
이와 같이 수량이 많은 품종들을 증식시켜 널리 보급하는 데는 채종답(採種畓)이 필요하게 되어 1922년에는 법으로 읍면 단위에 채종답을 설치하도록 하여 연차적으로 계획적인 종자 갱신(種子更新)을 꾀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벼는 우리나라에 거주하던 일본인으로 하여금 도정공장(搗精工場)과 미곡상조합(米穀商組合)을 조직, 경영하게 하여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게 하였다. 이에 수출품의 종류와 품질을 규격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1917년에는 총독부령으로 미곡검사규칙(米穀檢査規則)을 정하여 가공과 수출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1930년에는 공전의 대풍작으로 1918만1000석을 생산한 데다 일본에서도 대풍작이었으므로 일본으로의 쌀수출이 어렵게 되면서 미곡 저장의 필요성이 커져 창고를 증설하는 한편, 미질 통제를 통하여 감산을 유도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로 구성된 도정업자조합연합회와 조선곡물조합연합회(6개 협회, 236개 조합, 4,900수출상) 들의 극성과 15만 가구에 이르는 일본인 농가의 활로를 열어 주기 위해 쌀의 일본 수출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그 뒤 1934년 일본의 쌀 흉작은 이러한 정책을 적중시켰고,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에는 2679만7000석이 생산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만주와 화북지방에 주둔한 일본군과 민간인의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증산을 강행하였고, 생산된 쌀은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일제의 수요에 따라 징발되었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공출해 간 벼를 도정(搗精), 반출해 가기 위해 일본인들에 의해 대규모 도정공장이 설치·운영되었으니, 연간 1만 석 이상의 정미(精米)를 도정하는 공장이 200개 이상이나 설치되었다.
연간 현미(玄米) 200만 석, 정미 450만 석 등 모두 합하여 650만 석이 가공 수출되었으며, 진남포와 인천에 있던 공장은 당시로는 초현대적 시설이라고 할 만큼 좋은 시설이었다.
이와 같이 쌀을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밝힌 다수성 품종의 보급과 더불어 수리시설의 증설에 따른 수리안전답의 증가와 재배법 개선이 억지로 권해졌기 때문이다.
민족항일기의 벼농사 중 못자리는 양상식 단책형(揚床式單柵型)으로 바뀌고 직파 재배는 대부분 이앙 재배로 바뀌었으며, 모내기법도 못줄을 이용한 정조식(正條式) 소주밀식이 표준이앙법이 되었다.
민족항일기에 쌀 증산을 가져오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화학비료에 의한 지력증진술(地力增進術)의 개발이었다. 한말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지력증진술은 유기질비료(퇴비·구비·녹비·인분뇨)의 사용과 객토·건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후 민족항일기의 화학비료 사용에 의한 증수효과가 높아지면서, 1921년부터는 함경도 흥남에 설치된 질소비료공장에서 질소비료가 생산되기 시작하여 1924년에는 유산암모니아 1,726M/T이 생산·이용되고, 그 뒤 계속 증가하여 1936년에는 8만1706M/T이 생산·이용되면서 쌀 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화학비료 생산이 악화되자 비료 시용을 절약하기 위하여 이랑 위에 모를 심는 수도이랑재배[水稻畦立栽培]가 권장되어 1945년에는 12만까지 확대되었으나, 이 방법은 축력(畜力)을 이용하는 데 제약이 있고 이랑을 세우는 데 제반 노력이 많이 들어 광복이 되면서 사라졌다.
일제 말기에 일제는 증산을 적극 독려하면서 생산된 쌀은 군량미 충족을 위해 강제로 징발하였고, 굶주린 우리 국민을 위해서는 만주산 대두박(大豆粕)을 대신 배급해 주는 극성을 부리기도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광복 후의 벼농사
광복 후 남한의 주요 기간산업은 농업이었고, 농업은 우리 국민의 주식인 벼농사를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광복 후의 혼란 속에서 농약·비료 등의 영농자재 생산이 막혀 미곡 증산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해외 귀환동포, 6·25전쟁중 북한에서 탈출한 월남동포들로 인하여 인구 증가에 따른 쌀수요는 계속 증가되었다. 따라서 증수를 위한 재배기술의 새로운 모색이 계속 추구되었다.
새 기술의 하나로는 1949년에 보급되기 시작한 황산식 수도재배법(黃山式水稻栽培法)이 있다. 이 방법은 전라남도 해남군의 황산면에서 이재훈(李載勳)이 온상에 건묘육성(乾苗育成)을 하여 조기 이앙함으로써 10a당 벼 8석을 올려 한때 선풍을 일으켰으나, 일찍이 모내기를 한 결과 농약이 없던 당시에 이화명충(二化螟虫)의 피해가 극심하여 보급면적은 1만DMF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 중앙농업기술원(지금의 농촌진흥청)장인 채병석(蔡丙錫)은 1955년경 일본에서 벼의 보온절충식 육묘법(保溫折衷式育苗法)에 의한 조기 재배기술을 도입하였다.
초기에는 한지(韓紙)에 기름을 발라 이를 못자리 위에 덮어 보온 육묘하였으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닐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보다 편리한 비닐을 덮어 이용함으로써 획기적인 육묘기술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보온용 비닐이 보급되면서 못자리에 비닐을 수평으로 덮어 오던 방식에서 최근에 보는 것과 같은 터널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광복 후 1970년대까지의 벼농사 상황을 통계적으로 살펴볼 때 재배면적은 1945년부터 1949년간의 5년 평균 109만1779㏊였다. 이를 100으로 볼 때 1955년부터 1959년간의 평균 면적은 111만1162㏊로 2% 증가에 그쳤으나, 그 다음 1965년부터 1969년간은 평균 123만3139㏊로 1945년부터 1949년간의 평균에 비해 13% 증가하였다.
생산량은 1945년부터 1949년간에 연평균 214만1550M/T으로 이를 100으로 할 때, 1955년부터 1959년간에는 294만1807M/T으로 37%가 증산되었고, 1965년부터 1969년간에는 366만1859M/T으로 1945년부터 1949년간 평균 대비 71%가 증산된 셈이다.
1㏊당 수확량은 1945년부터 1949년간 평균 2,401㎏으로 이를 100으로 할 때, 1955년부터 1959년간 평균 2,647㎏으로 10%가 증가되었고, 1965년부터 1969년간의 평균은 2,970㎏으로 1945년부터 1949년간 평균 대비 24%의 증수를 가져온 셈이다.
이와 같이 재배면적의 증가나 단위면적당 증수 등은 이 기간 내에 개간(開墾), 간척(干拓), 수리시설의 확장, 충주비료를 비롯한 비료공장의 신설 및 비료의 국내 자급, 농약 등 영농 자재의 국산화, 그리고 품종 및 종자 갱신 등의 효과가 총화로 나타난 결과였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수확량으로는 국민의 주곡을 댈 수 없을 뿐 아니라 단위면적당 수확량의 경우 일본에 비하면 월등히 낮은 수준이었으니, 그 주된 원인은 지력이 낮은 데서 비롯된 추락현상(秋落現象)과 도열병(稻熱病)의 발생이었다.
이상과 같은 벼농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열병에 견디면서 시비량(施肥量)을 늘려도 벼식물이 쓰러지지 않는 성질[耐病耐倒伏性]을 지니면서 획기적인 다수성 품종을 육성 보급하는 것이 벼농사기술 개량의 큰 과제였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허문회(許文會)는 이에 착안하여 1960년대 후반에 인도형 벼(Indica)와 일본형 벼(Japonica)를 교잡 육종하여 내병내도복다수성의 통일계(統一系) 품종을 개발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계속 보급하기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쌀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다.
참고로 1975년부터 1979년까지의 평균 ㏊당 수확량을 보면 4,480㎏으로 1945년부터 1949년간 평균 2,401㎏에 비해 87%의 증수를 가져오게 되었고, 1977년에는 ㏊당 4,940㎏, 총생산량 600만M/T(4170만 석)의 대풍작을 이루어 기록적인 증산을 가져와 일본의 수량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통일계 품종은 획기적인 다수성 품종이기는 하나 인도형 벼의 형질이 섞여 미질이 재래종과 같지 않으므로 일반의 기호에 맞지 않았다. 이에 미질 개량을 위하여 새로운 품종을 육성·보급하였으나, 1978년에는 다시 도열병이 크게 발생하였고, 1980년에는 광범한 냉해를 입게 되었다.
따라서 1980년대에 들어와 통일계 품종의 보급을 줄이면서 일반계 품종의 보급을 늘린 결과 단위면적당 수확량 및 총생산량은 1970년대 후반을 따를 수는 없어도 1981년 이래 1986년까지 6년간 연속 풍작을 가져오게 되었다.
1981년부터 1985년간 ㏊당 연평균 수확량은 4,430㎏로 1970년대 후반보다 약 50㎏ 감산이 되었으나 생산이 매년 고르게 안전하여 총수확량은 연평균 3743만1000석으로 1970년대 후반의 3784만9000석과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후 1990년대는 1980년대까지 주식인 쌀의 식량 자급자족의 생산목표가 달성되고, 세계화에 따른 농산물 수출입의 개방화가 넓어져가고 식생활도 쌀에만 의지하지 않게 됨에 따라 그 생산량도 차츰 줄게되었다. 그 예로 1998년의 벼농사 수확량은 3540만석이었고, 1999년에는 3655만석이었다.
하지만 벼농사는 여전히 우리의 전통적인 업이었고, 주식으로 자리잡고 있으므로 경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세계화에 따른 식량의 무기화가 예상되는 21세기를 대비해서라도 벼농사는 특히, 최첨단 산업과 함께 가야할 것이다.
그러나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전체 산업인구에 비해 점점 낮아져가고 노령화되어 가는 어려움은 있다. 하지만 이 벼농사는 이제 세계화에 대비한 다양한 농업품목과 서로 조화롭게 현대적인 품종의 개량, 농기계·시비·토지개량 등의 최첨단화로 시대적인 추이에 맞춰나가야 할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허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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