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전승되다가 1915년경 사리원으로 옮겨 전승되던 탈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현, 중요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그 근원은 산대도감 계통극의 해서(海西)탈춤에 두고 있는데, 해서지방에서는 5일장이 서는 거의 모든 장터에서 탈꾼들을 초빙하여 1년에 한 번씩 탈춤을 추며 놀았다고 한다.
봉산은 농산물과 수공업 생산물의 교역지이며 또 소도시로서 탈춤공연의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탈춤공연이 성행하였다.
약 200여년 전 봉산의 이속(吏屬) 안초목(安草木:初目의 와전)이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많은 개혁을 한 뒤로 이속들이 주로 이 놀이를 담당하게 되었고, <봉산탈춤>이 해서지방의 대표적인 탈춤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에는 없고 <봉산탈춤>에는 들어 있는 사자춤과장도 약 100여년 전에 새로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주로 5월 단옷날 놀았지만, 원님의 생일 · 부임날 같은 관아의 경사, 중국사신 영접 등의 행사에 특별히 연희되었다고 한다.
이 탈춤은 원래 봉산 구읍 경수대에서 연희되었으나, 1915년경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기게 되고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자 이 놀이도 사리원으로 옮겨져 경암산 아래에서 놀게 되었다.
이 탈춤은 다른 지방의 탈놀이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면서 개량하였고 명수들의 배역과 뛰어난 연기로 주위에 명성을 떨쳤다. 이 결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강령탈춤>과 함께 황해도 탈놀이의 최고봉을 이루었으며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현, 중요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고증자는 첫목중 · 노장역의 김진옥(金辰玉)과 놀량창 · 사자 마부역의 민천식(閔千植) 등이다.
이 놀이는 5월 단오에 벽사(辟邪)와 기년(祈年)의 행사로서, 또 하지의 축제로서 행하여지는데, 놀이준비는 군민에게서 비용을 거두어들이고 의상을 무당에게 징발하여 단오절에 앞서 약 1개월간 읍내에서 떨어진 절에 가서 합숙하며 연습을 한다.
사리원으로 옮겨오기 전에 봉산탈춤을 놀았던 봉산 구읍의 경수대는 나지막한 축대를 쌓아 그 위에서 놀았으나, 사리원에서는 경암루 앞 광장에 28개의 구획을 가진 반원형의 다락을 매고, 그 안마당에 멍석을 깔아 탈판을 마련하였다.
이 28개 다락 중 탈판 오른편 제3의 구획이 탈막[改服廳]으로 쓰였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경암루 뒤를 탈막으로 썼으며, 이 반원형 2층 관람석 다락의 사용권은 공연비용을 내는 상인들에게 맡겨졌다. 탈판은 낮에는 단오놀이의 씨름과 여자들의 그네뛰기에 사용되었고, 밤에는 장작불을 피워놓고 밤새도록 탈놀이를 하였다.
놀이내용은 길놀이 · 고사 · 무동춤으로 이루어진 전편과 탈놀이로 이루어진 후편으로 구별된다. 길놀이는 탈놀이에 출연하는 일부가 악공의 주악을 선두로 사자 · 말뚝이 · 취발이 · 포도부장 · 소무 · 양반 · 영감 · 상좌 · 노장 · 남강노인의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를 일주한다. 이 때 원숭이는 앞뒤로 뛰어다니며 장난한다.
일주하는 도중 광장에 이르면 행렬자는 모두 어울려서 한참 춤을 추고, 다시 열을 지어 지정된 놀이터로 가서 본격적인 탈춤을 시작한다. 원숭이와 사자는 놀이판이 좁아지면 관객을 정리하여 이를 넓히는 일도 한다. 근래에는 길놀이가 없었고, 나무판에 광고문을 적어 사방에 붙였을 뿐이라고 한다.
탈놀이는 크게 7과장(科場:마당)으로 나누어진다. 제1과장 ‘4상좌춤’은 사방 신(神)에 대한 배례로서 벽사의 의식무(儀式舞)이다. 제2과장은 ‘8목중춤’으로, 제1경 ‘목중춤’과 제2경 ‘법고놀이’로 이루어져 있다. ‘목중춤’은 여덟 목중이 주로 사설과 춤으로 각각 자기 소개를 하며, ‘법고놀이’는 목중 1·2가 법고를 가지고 재담을 한다. 근래에는 법고놀이가 없어졌다.
제3과장은 ‘사당춤’으로, 7명의 거사들이 화려하게 치장한 사당을 업고 등장하고 홀아비거사가 사당을 희롱하다 쫓겨나며, 7명의 거사들은 놀량가를 합창하며 질탕하게 논다.
제4과장은 ‘노장춤’으로, 제1경 ‘노장춤’과 제2경 ‘신장수춤’, 제3경 ‘취발이춤’으로 나누어진다. ‘노장춤’은 생불(生佛)이라는 칭송을 받던 노장이 소무에게 유혹되어 파계하는 대목으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보여준다.
‘신장수춤’은 노장이 소무의 신을 외상으로 사자, 신발값을 받으려고 신장수가 원숭이를 보냈다가 장작전으로 오라는 노장의 편지에 장작찜을 당할까봐 급히 퇴장한다. 현실적인 인물이 된 노장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취발이춤’은 취발이가 노장과 대결하여 노장을 물리치고 소무와 사랑을 나눈 뒤 아이를 얻고서 자문자답으로 아이를 어르고 글을 가르치고 신세타령을 하는 내용이다. 노장과 취발이의 대결은 늙음과 젊음, 겨울과 여름의 대결로서 해석할 수도 있으며, 취발이가 소무에게 하는 모의적인 성행위와 출산은 풍요제의적(豐饒祭儀的) 성격을 띠고 있다.
제5과장은 ‘사자춤’으로 파계승들을 벌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보낸 사자가 내려와 목중을 잡아먹으려고 하다가 목중들이 회개하겠다는 말을 듣고 용서하고 함께 춤을 춘다. 제6과장은 ‘양반춤’으로서 주로 말뚝이와 양반 3형제와의 재담으로 이루어진다.
새처를 정하는 놀이, 시조짓기와 파자(破字)놀이, 나랏돈 잘라먹은 취발이를 잡아오는 과정들을 통해 말뚝이는 독설과 풍자로써 양반들을 신랄하게 욕보인다.
제7과장은 ‘미얄춤’으로 난리중에 헤어졌던 영감과 미얄할미가 서로 만났는데, 영감이 데려온 첩 덜머리집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미얄은 영감한테 맞아죽는다. 남강노인이 등장하여 무당을 불러 지노귀굿을 해준다.
서민생활의 곤궁상과 일부다처제로 인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횡포를 보여주며, 마지막의 굿은 탈춤의 기원이 굿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연희는 모두 마친다. 배역들은 가면을 소각하는 소제(燒祭)를 치르면서 기풍(祈豐)과 동내의 무사를 축원한다.
<봉산탈춤>에 사용되는 가면은 상좌 4개, 목중 8개, 거사 6개(목중탈을 겸용), 사당(소무탈 겸용) · 노장 · 신장수 · 원숭이 · 취발이 · 맏양반(샌님) · 둘째양반(서방님) · 셋째양반(종가집 도련님) · 말뚝이 · 영감 · 미얄 · 덜머리집 · 남강노인 · 무당(소무탈 겸용) · 사자 등 모두 34역으로서 겸용 가면이 있기 때문에 26개가 사용된다. 가면의 재료는 종이이다. 악기는 피리 · 젓대 · 북 · 장구 · 해금이며, 가락은 염불 · 타령 · 굿거리장단이다. 춤사위는 깨끼춤이 기본을 이룬다.
역대 예능보유자는 민천식(놀량창 · 사자마부) · 김진옥(첫목중 · 노장) · 이근성(李根成:목중 · 취발이 · 사자) · 김용익(金龍益:목중 · 사자마부) · 오명옥(吳明玉:피리 · 해금 악사) · 최경명(崔景明:말뚝이 · 취발이) · 김선봉(金先峰:상좌 · 목중) 등이 있으며, 2020년 현재 예능보유자로는 윤옥(尹玉:상좌 · 목중 · 소무) · · 김애선(金愛仙:소무 · 상좌 · 목중) 등이 지정되어 있다. 채록본으로는 송석하채록본(宋錫夏採錄本, 1946) · 임석재채록본(任晳宰採錄本, 1957) · 이두현채록본(李杜鉉採錄本, 1966) · 최상수채록본(崔常壽採錄本, 1967) 등이 있다. →탈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