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이다.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지낸 원선지(元善之)의 손자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원송수(元松壽)의 아들이다.
1390년(공양 2) 2월 군기소윤(軍器少尹)으로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성부윤 김백흥(金伯興)과 함께 순군(巡軍)에서 국문을 받다가 김백흥이 옥사함으로 인해 풀려났다가, 같은 해 4월 광주(光州)로 유배되었다.
1391년 1월 국대비의 생일을 맞아 하륜(河崙)·우인열(禹仁烈) 등과 함께 특사로 풀려 나온 뒤 장단의 대덕산(大德山)에 은거하였다.
1398년(태조 7) 2월 그는 합문인진사(閤問引進使)로서 그의 딸을 후궁(後宮)으로 들이었고, 그 딸이 1406년(태종 6) 5월 성비(誠妃)로 봉해졌다. 1413년(태종 13) 정월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 4월 검교한성부사(檢校漢城府事)를 거쳐 1435년(세종 17) 1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듬해 1월 한창수(韓昌壽)·오승(吳陞)과 함께 궤장(几杖)이 하사되었으며, 같은 해 윤6월 치사(致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