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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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니 / 낙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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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 은 · 옥 · 나무 따위의 인재에 글씨나 문양 등을 조각하여 인주 등을 발라 문서에 찍어 증명하는 신물(信物). 도장.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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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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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금 · 은 · 옥 · 나무 따위의 인재에 글씨나 문양 등을 조각하여 인주 등을 발라 문서에 찍어 증명하는 신물(信物). 도장.
내용

도장 또는 인감(印鑑)·인신(印信)이라고도 하나 엄밀히 말하면 녑(鉩,璽)·인(印)·장(章)·도서(圖書)·도장(圖章)·육기(戮記) 등으로 모두 다르다.

인장은 본래 정치에 있어 신빙하게 하는 신물 또는 새절(璽節)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인장의 역사는 오래되어 일찍이 환인(桓因)이 그 아들 환웅(桓雄)에게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세상(人世)을 구하게 함에 있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냈다는 단군고사(檀君故事)에서 비롯되고 있다.

중국 또한 상주시대(商周時代)로부터 신빙의 공구(工具)로 쓰였으며 그 유물이 오늘에 전하는데, 그 명칭은 진(秦) 이전에는 ‘녑鉩’이라 하였고 그것이 곧 고대의 ‘사(璽)’자이다.

새인(璽印)의 형상을 위는 ‘{{#243}}’, 아래는 ‘{{#244}}’으로 하여 눌러 찍는 모양의 그림으로 이것을 합하면 ‘尒=尔’가 된다.

진시황이 옥으로 새를 만들어 옥새(玉璽)라 칭하고 이로부터 후왕(侯王)을 제외한 일반 신민(臣民)은 사를 인(印)으로 일컫게 되었다. 인자는 갑골문(甲骨文)에 보면 손으로 사람을 눌러 꿇어앉히는 형상인 ‘{{#198}}’으로서 ‘사’자와 더불어 눌러 찍는다[鈐壓 : 검압]는 뜻이 같다.

한(漢) 무제 때 인제(印制)에 크고 작은 것을 규정하여 인과 장의 구별이 생겼으며, 당나라 무후(武后, 685∼704)는 ‘璽’의 음이 ‘사(死)’와 같다 하여 ‘보(寶)’로 고쳤으므로 그 뒤 황제의 ‘사’를 ‘보’로도 일컬었다.

인장은 봉니(封泥)로부터 인니(印泥 : 인주)로 붉게 찍게 되어 인은 ‘기(記)’ 혹은 ‘주기(朱記)’라고도 한다. 관인(官印)은 관계의 등급에 따라 가장 큰 것은 4치[寸]에 이르고 모두 관변(寬邊)이며, 정방형인 것은 인, 장방형인 것은 관방(關防)이라 칭하였다.

계급이 낮은 관원들의 인은 조정을 거치지 않고 발급되는 만큼 검기(鈐記) 혹은 착기(戳記)라 하였으니 인장을 찍어 기록한다는 뜻이다.

송나라 이후 도서를 수장하는 사람의 인에 ‘某某圖書’라는 인문(印文)을 썼기 때문에 ‘도서’가 곧 인장의 별명이 되었고 따라서 인장의 격 높은 새로운 이름이 되었다. 이후부터 공과 사를 가려서 관인은 인이나 장으로 일컫고 사기(私記)·도서·도장은 사인(私印)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많은 명칭이 모두 인장을 뜻하는 것이며, 또 아주 작은 인장이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끌고, 이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 제도상으로 격식이 많고 각인의 예술적 가치가 뚜렷할 뿐 아니라 인장을 사용하는 사람의 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장의 재료로 금·은·동·철 등 금속은 물론 옥·마노·수정·비취 등의 광물 중에도 인재가 많이 발굴, 연구되었다.

이 밖에도 식물류의 인재로는 목인(木印)에 회양목·배나무 등 결이 고운 것과, 죽인(竹印)에는 죽근(竹根)을 쓰며 과핵(果核) 중에 도핵(桃核)·감람핵(橄欖核)·면가핵(緬笳核) 그리고 침향목(沈香木)·가남목(伽㑲木) 등 천연적인 과형(果形)을 지닌 인재들이 인인(印人)들의 취미를 불러일으킨다.

등넝쿨이나 늙은 매화나무 뿌리로서 딱딱한 부분을 골라 그 천연적인 형태를 이용하기도 한다. 동물류의 인재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한편 귀중하다는 의미로, 상아·우각(牛角)과 우골(牛骨) 등을 사용한다.

인공제조류의 인재로는 도인(陶印)·자인(瓷印)·소교인(塑膠印), 그리고 화학물질의 발달로 플라스틱 인재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바가지나 가죽을 이용할 수도 있고, 그밖에 금·돌·사(絲)·죽(竹)·포(匏)·흙·혁(革)·나무 등 어느 것이나 인재로 쓸 수 있다.

이토록 진귀한 보물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 재질이 견고하고 미려하며, 인뉴(印紐 : 인재 위에 각종 物形, 특히 瑞獸 등과 樓臺)의 정교한 조각 및 인신(印身)에 산수·인물·화조 등을 부각(浮刻)하는 박의(薄意) 등의 아름답고 뛰어난 솜씨는 곧 그 인장을 사용하는 주인의 품격을 나타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인재에 있어서 견고한 것에 반하여 연성석질(軟性石質)을 택하게 된 것은 원나라 이후 화유석(花乳石)·청전석(靑田石)·수산석(壽山石) 등의 발견으로 인제(印製)는 크게 달라졌다. 연성석질로 인재를 삼게 된 것은 각인도 서법(書法)과 일치한다는 의식에서 왔다.

또 인장이라 한다면 뉴(紐)·신(身)·면(面)·문(文)의 사종체성(四種體性)이 구비되어야 하나 특히 인신과 인면을 일컬으며, 인면상(印面上)에 새겨진 인문에는 학문적인 성격이 커지게 되어 곧 예술적인 면에서 다루는 전각이 대두된다.

인면에 인문을 어떻게 전사(篆寫)하고 포치(布置)하여야 하는가를 저술하기는 원나라 오구연(吾丘衍)의 ≪학고편 學古篇≫이 처음이다.

이 저술은 후대의 전각개념과 일치하나 전각 2자는 쓰지 아니하였고, 그 뒤 주양공(周亮工)이 지은 ≪인인전 印人傳≫에 학문적인 중요문헌으로 치인(治印)하는 사람을 전각가라 칭하면서 인인(印人)이라 하였다.

진서(秦書) 8체의 하나인 모인(摹印)은 일찍부터 학자들이 인용하고 있어 전각과 다를 바 없으나 ‘전각’ 2자가 넓게 채용되기는 청나라 건륭연간에 진극서(陳克恕)가 쓴 ≪전각침도≫라는 전각입문서(篆刻入門書)가 나오고 부터이다.

전각의 발전은 화유석·청전석·수산석 등 연성석재가 인재로 채택됨으로써 인문과 치인이 동일인에 의하여 완성될 수 있는데 기인하였다.

그리하여 전과 치(治 : 刻), 즉 인문과 치인(治人)이 동일인이 못되던 것이 비로소 한 사람에게 집중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문의 제작은 전사와 전각을 포괄하는데, 시대에 따라 연변(演變)되었다.

즉, 원대(元代) 이전 인문자체(印文字體)의 제작을 모인이라 칭하고 그 이후 현대에 이르러서는 전각이라고 칭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인장’은 ‘모인’과 ‘전각’의 두 시대를 포함하는 것이다. 석재전각(石材篆刻)과 원·명 이전의 모인이 가장 크게 다른 것은 전사인문 뿐 아니라 도법(刀法)에까지 미치고 있다.

곧, 도법이란 각도(刻刀)로 끊고 자르는데 신채(神采)가 갖추어지고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니, 마치 서가(書家)가 붓으로 서사(書寫)하되 운치가 나오는 것과 같은 성질이라 동인(銅印)과 옥인(玉印)의 인문과 다른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예술가인 문팽(文彭)이나 하진(何震)은 그들의 창작정신을 크게 발휘할 수 있어서 진(秦)·한(漢)의 인장과 원나라 때의 소전(小篆) 이외의 새로운 풍격을 표현할 수 있었다. 곧, 전각은 전법(篆法)의 포치와 필획의 격조 및 도법에 이르도록 더욱 큰 영역을 개척하였다.

자체의 안배에 있어서 필획을 더하거나 덜할 수도 있고 차필(借筆)나필(挪筆: 획의 이동) 등의 방법이라든가 용도(用刀)에 있어서는 정도(正刀)·반도(反刀)·단도(單刀)·쌍도(雙刀) 등의 명목이 강구되었다.

곧, 전각은 서가가 좋은 서를 쓰는 것과 같아서 새로운 경지와 풍모를 추구하게 된다. 이로부터 전각은 문인이나 서화가 사이에 비상한 관심과 숭상의 대상이 되었다.

청나라 초기 주양공 부자가 편집한 ≪뇌고당인보 賴古堂印譜≫를 보면 전각가의 창작품이 많으며 진한인(秦漢印)을 모방한 것은 비교적 적다. 이것으로 당시 전각의 정신과 풍상(風尙)을 알 수 있다. 청대의 전각가는 절파(浙派)와 완파(皖派)및 방고(仿古 : 秦漢印 專仿)파로 나누어진다.

청말의 조지겸(趙之謙)·오창석(吳昌碩)은 금문(金文)·비판(碑版)·봉니·전와(磚瓦)의 풍격을 인문에 참작하였고, 또 제백석(齊白石)은 그 독특한 도법을 발휘하여 이들 모두 전각이라는 명칭으로 귀납된다.

그리고 그 기본조건은 연성석재로 운도(運刀)에 제공되는 것이고, 또 전사적 의장(意匠)에 제한됨이 없이 모든 재능이 눈부시게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파 각가의 작품은 모두 특색과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금석과 인장·전각은 지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성격을 달리한다. 따라서, 금석 2자로 인장이나 전각에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금석이 지니는 뜻은, 금은 고대의 금속(주로 청동)으로 제작된 기물이며, 석은 석재로 제작된 기물이나 석면에 새겨진 서화를 말한다.

고대 인장의 대부분이 동이며 옥·석 등은 드물다 하여도 이들은 ‘금석’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금석에 포함되는 종류는 너무 많다.

간략하게 말하여도 금류(金類)는 예기(禮器)·악기·병기 등이며, 석류(石類)는 석호(石虎)·석효(石梟)·석고(石鼓)·석비(石碑)·마애(摩崖) 등이다. 인장은 그 속의 극소부분으로, 금석을 대표할 수는 없다.

인장·전각이 금석과 관계되는 것은 ① 인장 자체가 금석의 일종으로 인장의 제도 및 인문의 예술성이 금석에 포함된다.

② 인문의 자체는 역대 서체 중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곧 역대 서법의 하나로 각 시대 통행서체와 상관되며 또 역대 서법이 기탁되는 기물과 상관된다.

③ 비록 각 시대의 서체와 상관되기는 하나 일종의 체세와 풍격을 형성하며, 또 일종의 독자적인 면목을 지닌 예술이다. 따라서, 그 발전하고 변화된 품이 크게 빛나는 역사를 가져서 금석부분 중 당당하게 일류를 이룬다.

④ 근대의 인문은 금석부문 중 주진금문(周秦金文)·진한석각(秦漢石刻)·전와도니(磚瓦陶泥)의 서체와 서풍을 광범하게 인문에 채취함으로써 더욱 전각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인장·모인·전각과 금석의 관계는 이토록 밀접하다. 그러나 ‘금석’으로 인장·모인·전각의 이름을 대칭할 수는 없다.

인장·전각에 있어서 그 범위 안에는 서법적인 성분이 지극히 크다. 즉, 서법과 도법의 비중으로 따져도 서법이 도법보다 더욱 크다. 사실상 모인 혹 전각예술의 성취는 서법부분을 제거하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전각예술은 곧 서법예술의 일종이다.

그리하여 중국이나 일본은 전국미전에 전각을 서부(書部)에 포함하고 있어 그 견해를 알 수 있게 한다. 최근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동아미전’ 서부와 ‘한국서예대전’에 전각을 두게 된 것도 이 까닭이다.

전각작품은 그 크기에 제한을 받으므로 대규모 전람회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그리고 전각의 특성을 논한다 하여도 실상 필(筆)과 도(刀)의 양종공구(兩種工具)가 합작하여 이루어지는 서법작품인 것이다.

모인이나 전각을 그 사적(史的) 발전에 비추어 고찰하자면, 고대에는 당시에 통용하는 서체로써 인면에 적용하도록 하였다. 통용서체가 속사(速寫)를 위주로 연변되었고 그 미관(美觀)은 초서(草書)에 지극하였다. 그러나 초서는 인면에 올리기에는 적당하지 않아 인문서체와 통용서체의 거리는 멀어져만 갔다.

죽(竹)·목간(木簡)이 폐지됨으로써 봉니의 사용도 따라서 폐지하게 되었고, 방촌인장(方寸印章)이나 모인 및 무전체(繆篆體)의 인문도 길이 끊기게 되었다.

즉, 인장문자와 통용서체의 거리가 멀어졌고 해서(楷書)의 필세는 반문주각(反文鑄刻)에 부적당하게 되자 관인에서 보는 굴곡사법(屈曲寫法)이 생겼으나 이것은 서법예술의 본의(本義)에 합치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인문이 주·진·양한의 걸작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쇠퇴하였음을 깨달은 예술가들은 인문자의 예술적인 강구와 청전석·수산석과 같은 연성석재의 생산으로 빛나는 전각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각작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서법에 대한 조예이다. 이에 상당한 조예라면 서법예술의 도리를 체득하고 그 미묘하며 정예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능히 전예의 필성을 알아서 표현할 수 있는 실력의 기초적 조건을 길러야 한다. 그러자면 많은 인보를 보고 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갑의 장점과 을·병·정의 장점이 분별되어야만 여기에 호인(好印)·범인(凡印)·열인(劣印)의 분별이 있게 된다. 이것은 서법의 우열을 체득하는 것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인장·전각은 고려시대의 동인(銅印)이 있고, 조선시대의 관인·사인이 있다. 고려의 인장으로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동인으로 방인(方印)·육각인(六角印)·원인(圓印)이다.

이들의 인문은 판독하기 어려운 것이 많고, 자체는 구첩전(九疊篆)이며 배자(配字)는 방사선식이라 문자는 원주(圓周)로 향하여 머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양식의 동인은 대개 봉함인(封緘印)이다. 이러한 고려인의 유풍은 조선조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조선조의 관인은 모두가 동인 내지 철인으로 상서원(尙瑞院)에서 주조하였으며, 방인으로는 방촌과 3촌·4촌에 이르고 인문에 있어서는 구첩전과 소전이 그 대부분을 이룬다.

반통인(半通印)의 형식을 띤 것으로는 대체로 3촌반인(三寸半印)이며, 인문은 해서이고 약식으로 쓰이는 예가 많다. 대체로 어보(御寶)인 규장각보(奎章閣寶)나 선사지보(宣賜之寶)와 같은 동인은 3촌방의 굵은 인변(印邊)으로 거의 정방형의 소전이 굵고 전중(典重 : 법도에 맞고 점잖음.)한 배치이다.

우리 나라의 국새는 고려이래 조선조에 이르도록 중국의 승인을 겸한 ‘高麗國王之印(고려국왕지인)’이나 ‘朝鮮國王之印(조선국왕지인)’으로 왕조의 변혁이 있을 때에는 전 왕조의 국새와 교환하도록 하였다.

‘조선국왕지인’은 대중국관계 이외에는 쓰지 않고 ‘體天牧民永昌總嗣(체천목민영창총사)’라는 옥새를 세종 때 만들었다.

성종 이후에는 ‘施命之寶(시명지보)’가 교지와 교서에 쓰이고, 영조 때에는 ‘科擧之寶(과거지보)’는 과거에, ‘以德之寶(이덕지보)’는 통신문서에, ‘奎章之寶(규장지보)’는 춘방교지(春坊敎旨)에, ‘宣賜之寶(선사지보)’는 서적반포에 각각 사용되었다.

대한제국 성립과 더불어 ‘大韓國璽(대한국새)’·‘皇帝御璽(황제어새)’·‘勅命之寶(칙명지보)’ 등이 사용되었다.

사인(私印)의 종류에는 방형·장방형·원형·잡형 등이 있으며, 인문으로 정하여지는 종류는 성명·표자(表字)·별호·관직·재호(齋號)·총인(總印)·서간·사구(詞句)·길어(吉語) 등 다양하다.

인문의 자체로는 고전(古篆)과 별체(別體)인 수서(殳書)·충서(蟲書)·어서(魚書) 등은 물론, 소전·무전(繆篆)·구첩전에 속하는 상방대전(上方大篆)이 그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나 가끔 예서·해서·행서의 여러 체도 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한국의 미 6-서예-』(임창순 감수, 중앙일보사, 1981)
『篆刻藝術』(王北岳, 臺北漢光文化公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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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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