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빈 안씨 (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전기 제11대 중종의 후궁.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499년(연산군 5)
사망 연도
1549년(명종 4)
본관
안산(安山)
출생지
경기도 안산
관련 사건
선조 즉위
내용 요약

창빈 안씨는 조선 제11대 중종의 후궁이다. 1499년(연산군 5)에 태어나 1549년(명종 4)에 사망했다. 1507년 궁녀로 입궐하여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를 모시다가 후궁이 되었다. 1530년 선조의 아버지가 되는 덕흥군을 낳았다. 1543년 종3품 숙용이 되었고 정3품 소용의 지위에 올랐다. 중종이 승하한 후 문정왕후의 배려로 계속 궁궐에서 살았다. 성품이 단정하고 온화하여 문정왕후와 사이가 돈독하였으며, 명종과 덕흥군의 아들들과도 관계가 돈독했다고 한다. 1577년에 정1품 창빈으로 추봉되었다.

정의
조선전기 제11대 중종의 후궁.
개설

창빈안씨(昌嬪安氏, 1499년∼1549)의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1507년(중종 2) 궁녀로 입궐하였다가, 후에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차남 덕흥군(德興君)의 3자 하성군(河城君)이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이다.

생애

아버지는 안탄대(安坦大)이며, 어머니는 황씨(黃氏)이다. 아버지 안탄대는 주1원종공신으로 주2의 관직을 받았고, 후에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도 주3에 추증되었다.

1507년(중종 2) 궁녀로 입궐하였고, 1518년(중종 13) 후궁이 되었다. 1521년(중종 16) 장남 영양군(永陽君) 이거(李岠)를 낳았고, 차남 이이수(李頤壽)는 일찍 사망하였다. 1526년(중종 21) 정신옹주(靜愼翁主)를 낳았으며, 1530년(중종 25) 3남 덕흥군 이초(李岹)를 낳았다. 1549년(명종 4) 사제(私第)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51세였다.

활동사항

9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대비전(大妃殿)에서 중종의 어머니인 왕대비 정현왕후(貞顯王后)를 모셨다. 이때 정현왕후에게 품성을 인정받아 중종의 승은(承恩)을 입었다. 20세였던 1518년(중종 13) 후궁이 되었고, 22세가 된 1520년(중종 15) 상궁(尙宮)이 되었다.

영양군과 정신옹주를 낳은 후 31세였던 1529년(중종 24)에 주4 종4품 주5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해 3월 왕비였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내 · 주6를 거느리고 창덕궁에서 주7를 할 때 함께 의식에 참석하였다. 이듬해 1530년(중종 25) 32세의 나이로 덕흥군을 낳았는데, 그가 선조의 아버지이다.

1543년(중종 35)에 종3품 주8이 되었고, 이후 정3품 주9의 지위에 올랐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승하하고 3년 상을 치른 후에 궁궐에서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문정왕후의 배려로 계속 궁궐에서 살았다.

창빈안씨는 성품이 단정하고 온화하여 왕대비 · 왕비의 인정과 신뢰를 받았다. 특히 창빈안씨가 사망한 후에 문정왕후가 그녀의 자녀들을 돌보아주었을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돈독하였다.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은 덕흥군의 아들들과도 관계가 돈독하여 이것이 훗날 하성군이 즉위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549년(명종 4) 사망한 이후, 그녀는 소용의 지위에서 1577년(선조 10)에 정1품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다. 장남 영양군에게 후손이 없자, 창빈안씨의 신주를 덕흥대원군의 사당으로 옮기도록 하였고,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에게 주10 하도록 하였다. 1681년(숙종 7)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의 상소로 창빈의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웠다.

묘소는 원래 경기도 양주군 장흥리에 있었으나, 장소가 좋지 않다고 하여 과천의 동작리(현재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국립묘지 내에 있는 창빈안씨 묘소는 198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683년(숙종 9)에 신정(申晸)이 짓고, 이정영(李正英)이 글씨를 쓴 ‘창빈안씨 신도비(昌嬪安氏神道碑)’가 함께 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한국 왕실여성 인명사전』(김창겸 외,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5)
『중종대왕과 친인척』(지두환, 역사문화, 2001)
「창빈안씨 신도비명병서(昌嬪安氏神道碑銘幷序)」(신정, 『분애유고』권10 : 『한국문집총간』 권129, 1994)
주석
주1

조선 중종 1년(1506)에 성희안,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 대군(晉城大君), 곧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정칠품 무관의 품계. 분순부위의 위이다.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정일품ㆍ종일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 고종 2년(1865)부터 종친의 아내에게도 주었다. 우리말샘

주4

조선 시대에, 궁중에서 품계를 받은 여인을 통틀어 이르는 말. 빈(嬪), 귀인(貴人), 소의(昭儀), 숙의(淑儀), 소용(昭容), 숙용(淑容), 소원(昭媛), 숙원(淑媛), 상궁 따위이다. 우리말샘

주5

조선 시대에, 임금의 후궁에게 내리던 종사품 내명부의 품계. 소원(昭媛)의 아래이다. 우리말샘

주6

조선 시대에, 왕족ㆍ종친의 딸과 아내 및 문무관의 아내로서 남편의 직품(職品)에 따라 봉작(封爵)을 받은 부인을 통틀어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7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궁중 의식. 우리말샘

주8

조선 시대에, 후궁에게 내리던 종삼품 내명부의 품계. 소원(昭媛)의 위, 소용(昭容)의 아래이다. 우리말샘

주9

조선 시대에, 왕의 후궁에게 내리던 정삼품 내명부의 품계. 우리말샘

주10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심.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임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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