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장군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김종서의 무덤이다. 김종서는 단종의 충신으로 계유정난 때 죽었다가 영조대에 복권되었다. 묘역에는 관리사, 신도비, 홍살문, 정려각이 있고 묘소에는 문인석, 동자석, 장명등, 망주석 등 석물과 묘비 3기가 있다. 묘역 입구에는 받침돌이 두꺼비인 신도비가 있는데 이는 현대에 제작되었으며 마을 풍수지리와 관련 있다. 정려각에는 아들 김승규의 정려가 함께 걸려 있다. 이 묘는 조선 후기 단종과 단종대 인물의 복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이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년)는 단종 대의 충신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月谷)에서 출생하였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한 뒤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어 1434년(세종 1) 육진을 개척하여 국토 확장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문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제수되어 어린 단종을 보필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에 수양대군에 의해 장군과 자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 1691년(숙종 17) 단종의 추복(追復)이 단행된데 힘입어 1746년(영조 22)에 신원(伸寃)되어 복직되었다. 이어 1747년(영조 23) 1월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金承珪) · 김승벽(金承壁)을 함께 복관시킬 것을 처음 제안하였고, 11월에는 김승규의 정려를 주장하여 관철되었다. 1758년(영조 34)에 영조는 시장(諡狀)을 준비할 것 없이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1786년(정조 10) 백악산(白岳山) 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된 옥함(玉函)에서 김종서의 위패가 발견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위패를 불천위(不遷位)할 것을 명하였고, 1791년(정조 15) 장릉 배식단(配食壇)에 배향되었다. 1804년(순조 4) 2월에는 김종서를 정려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현대에 세워진 신도비가 있는데, 신도비의 받침돌이 귀부가 아니라 두꺼비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마을 입구의 지형이 풍수지리상 지네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지네와 거북이는 서로 상극이어서 부득이 두꺼비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에 홍살문 그리고 율리재(栗里齋)라는 편액이 달린 관리사가 있다.
이곳을 지나면 정려각이 있는데, 김종서의 정려와 그의 아들 김승규의 정려가 걸려있다. 각기 ‘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증시충익공 김종서지문(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贈諡忠翼公金宗瑞之門)’과 ‘효자 통정대부병조참의 김승규지문(孝子通政大夫兵曹參議金承珪之門)’이라고 쓰여 있다. 실록에 따르면, 전자는 1804년(순조 4)에 받은 것이고, 후자는 1747년(영조 23)에 받은 것이다.
현판 뒤에는 각각 이채(李采)와 김종수(金種秀)의 기문이 있는데, 김종수의 기문에 의하면, 김종서의 11대손 김지복(金志復)이 상언하여 1781년(정조 5)에 효자 정려를 받게 되었다. 이 정려각은 1981년 공주시에서 김종서 묘역 정화사업을 추진할 때 후손인 김기원이 서산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옮겨와 건립한 것이다.
한편 묘소 주위에는 현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상석, 동자석,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이 있다. 묘소 오른쪽에는 3개의 묘비가 있는데, 좌측의 비는 최근에 건립되었고, 가운데 것은 1963년에 건립되었으며, 우측의 비는 1808년(순조 8) 공주판관 이익진(李翼鎭)이 지방 선비들과 함께 건립한 것이다. 앞면에는 ‘조선좌의정절재 김선생종서묘(朝鮮左議政節齋金先生宗瑞墓)’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김종서 사후 305년 만에 숙종대에 단종이 추복된 사실과 세장지(世葬地)가 공주 북쪽 요당면(要堂面) 율동리(栗洞里)라는 사실, 그의 옷과 신발[衣履]를 장사지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후기 숙종대에 단행된 단종 추복과 이후 단종대 인물의 복권을 이해하는데 상징적인 유적이며, 아울러 공주 일대 순천 김씨 세력을 추정해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