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삼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 모험단에 참여하여 순사 총살, 독립운동문서 배포,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모금에 주력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소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마음을 품고 1920년대 초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의 맹산지단의 조신성과 함께 독립운동 관련 문서의 배포, 친일파의 처단과 군자금 모금 활동에 주력하였다.
나병삼(羅炳三)은 1894년 평안남도 덕천 출신으로, 1922년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평소 일제의 총독 정치에 크게 반대하여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1921년 2월 조맹선(趙孟善)이 사령장(司令長)으로 있는 대한독립광복군(大韓獨立光復軍) 사령부(司令部)의 산하 청년 조직으로 1919년 11월 만주 관전현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大韓獨立靑年團聯合會)의 평안남도 맹산(孟山)지단의 중심인물인 조신성(趙信聖) · 김봉규(金琫奎) · 안국정(安國汀) 등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나병삼은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 평안남도 맹산지단 모험단(冒險團)에 장원보(張源輔)의 권유로 가입하였다. 이원보와 함께 단원 김명권(金明權)에게 권총 한 정과 탄환을 받아 1921년 2~3월경 권총을 휴대하고 덕천군 일대 강대순(姜大舜) 외 2명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600원의 자금을 빼앗아 동단의 평안남도 총무인 김봉규(金琫奎)에게 전달하였다.
1921년 2월 초 이운서(李雲瑞)의 집에서 나신택(羅信澤) · 예낙원(芮樂園) · 김병훈(金秉薰) · 이원보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 기관 파괴, 무기 탈취, 친일 부호의 처단, 군자금 모집 등을 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일제의 우편차를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921년 3월 20일 덕천우편국에서 영원 우편국으로 이송하는 우편차를 공격 대상으로 삼아 덕천군 풍덕면(豊德面) 신흥리(新興里) 대현(大峴)에서 우편차를 호위 중인 영원(寧遠)경찰서 순사 박의창(朴義昌)을 살해하고 공금 5,000원과 권총 1정을 확보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 기관을 파괴하기 위하여 각종 폭발물을 제작하는 한편, 맹산군 선유봉(仙遊峯) 중턱의 호굴(虎窟)을 근거지로 삼아 1만 2천 자의 활자와 3대의 인쇄기를 설치하고 각종 격문과 선전물을 인쇄하여 평안도 일대에 배포하였다. 이들은 특히 맹산군과 영원군(寧遠郡), 덕천군 등 3개 군에 걸쳐 경찰서와 군청 면소에 사형선고서와 협박장, 경고문 등 독립 관련 문서의 배포 및 친일파의 처단과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다가 같은 해 6월 중순경 조신성 지도부 등 19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일은 이른바 ‘대한독립단맹산지단사건’으로 당시 조선 사회에 대서 특필되었다.
1921년 11월 21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항고하였지만, 1922년 7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 살인’ 혐의로 상고 기각되어 같은 해 8월 28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