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대한문은 서울시 덕수궁에 있는 조선 후기 다포식 우진각지붕 형태의 문이다. 1906년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이 썼다. 대한문은 경희궁 흥화문처럼 단층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이다. 우진각지붕은 네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 형태를 말한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용마루와 추녀마루가 있다. 용마루 끝에는 매 머리모양의 장식이 있고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놓았다. 제자리에서 옮겨지면서 변형되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왔을 당시, 궁궐이 모두 불타버려서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거처하게 된 것이 덕수궁의 시초이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네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의 건물이다.
덕수궁은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을 짓기 전에는 임시로 즉조당(卽祚堂)을 정전으로 사용하고, 3문(門)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인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명례궁(明禮宮)을 옛 이름인 경운궁(慶運宮)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2년(광무 6) 들어 궁궐을 크게 중건하면서 정전인 중화전 · 중화문 · 외삼문(外三門)인 조원문(朝元門)을 세워 법전(法殿: 임금이 백관의 경축일 하례를 받는 정전)의 체제를 갖추었다.
얼마 뒤 인화문 자리에는 건극문(建極門)을 세우고 조원문 앞 동쪽에 대한문의 전신인 대안문(大安門)을 세워 새로 정문으로 삼았다.
1904년(광무 8) 함녕전(咸寧殿)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자 1904년에서 1906년(광무 10)에 걸쳐 이를 다시 중건하였고,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수리하면서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으며 지붕마루에 양성(兩城)을 하고 취두(鷲頭) · 용두(龍頭) · 잡상(雜像)을 얹었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1914년 도로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문 오른쪽에 있던 건물 및 담장이 모두 일제에 의하여 크게 파괴되었고, 이때 대한문도 궁 안쪽으로 옮겨졌다. 또한 1970년에도 도시계획으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 앞에는 돌짐승을 배치한 계단을 두어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었었으나, 지금은 계단 및 기단이 아스팔트 속에 묻혀 버린 채 돌짐승만이 땅 위로 드러나 있다.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이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다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연결하여 짜 맞추고 그 위에 평방을 놓았다. 기둥 위와 기둥 사이 평방 위에 촘촘하게 공포(栱包)를 배열하였는데 공포의 짜임새는 외이출목(外二出目) · 내삼출목(內三出目)이며, 바깥쪽 제공(諸工) 위에 놓인 살미첨차(山彌檐遮)들은 그 끝이 가냘픈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안쪽의 공포에는 판형 부재 끝에 구름모양(雲峰)을 조각하였다.
가구(架構)를 보면, 기둥 3줄에 모두 평주(平柱)를 세우되 가운데 줄에 있는 평주 위에 보를 연결하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운 다음, 이 위에 종보[宗樑]를 걸었다. 다시 이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장은 가운데 칸은 서까래를 드러낸 연등천장으로, 양옆 칸은 소란반자로 마감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용마루와 추녀마루를 양성하고 용마루 끝에 취두(鷲頭: 매 머리모양의 장식), 추녀마루에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놓았다. 제자리에서 옮겨지면서 변형되고, 여러 차례의 보수로 인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덕수궁 대한문은 경희궁 흥화문처럼 단층이며 우진각지붕으로 된 궁궐의 정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