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에서는 정3품의 외관직으로서 하남회북몽골군도만호부(河南淮北蒙古軍都萬戶府)에만 두었다. 당시 고려에 설치되었던 여러 만호부에도 이것을 두었는지는 의문이다.
도만호는 1300년(충렬왕 26) 이후에 설치된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의 직제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만호보다 상위직임에도 불구하고 임명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고려사』 백관지의 기록과는 달리, 실제로는 두지 않았거나 일반적으로 만호와 동일시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1374년(공민왕 23)경 고려의 수군(水軍)이 재건되면서부터 도만호는 만호와 확실히 구별되어 나타난다.
이 때 각 도 수군의 최고지휘관으로서 병선을 관령(管領)하고, 그 아래의 만호·천호(千戶)·영선두목인(領船頭目人) 등 수군 지휘관들을 통솔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8년(태조 7)과 1413년(태종 13)의 두 차례에 걸쳐 정비된 수군 관직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충청좌·우도도만호(忠淸左右道都萬戶), 경상도염포도만호(慶尙道鹽浦都萬戶), 경상도가배량도만호(慶尙道加背梁都萬戶), 전라좌·우도도만호(全羅左右道都萬戶) 등이 있어, 해상방어가 특히 중시되던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 각각 2명씩 배치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진관(鎭管)체제를 편성함에 있어서는 수군의 경우 주진(主鎭)에 수군절도사, 거진(巨鎭)에 첨절제사(僉節制使), 제진(諸鎭)에 만호를 각각 배치하였고, 이후 『경국대전』에도 그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