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은 고려로부터 조선에 전해진 향악 곡명이자 향악 정재명이었으나, 지금은 관악 합주 곡명이다. 동동 노래는 동동 정재 반주곡으로 동동 정재에 포함되어 고려로부터 조선으로 전해졌다. 노래 가사는 총 절로, 서사인 기구(起句) 1절과 일 년 열두 달을 노래한 12절로 이루어져 있다. 노랫말의 내용은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데, 고려와 조선 전기까지는 임금을 송도(頌禱)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남녀 간의 음란한 가사로 평가되어 폐기되었다. 지금은 그 선율만 남아 기악곡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다.
고려시대 민간 월령체(月令體) 동동 노래가 궁중으로 유입되어 동동 정재(呈才)와 그 반주곡이 되었다. 동동 노래는 동동 정재에 포함되어 조선으로 전해졌는데, 조선에서는 이 정재의 규모를 확대하여 그 이름을 ‘아박(牙拍)’으로 바꾸고, 노래만 동동이라고 하였다. 조선 전기에 동동 노래와 아박 정재는 연향악으로 연주되었는데, 섣달그믐에 잡귀를 쫓기 위해 행해진 나례(儺禮) 뒤 처용지희(處容之戱) 속에 주1 등과 함께 연행되었다.
고려시대 동동 정재의 순서는 『 고려사』 악지와 『 악학궤범』 권3 ‘동동조’에 기록되어 있고, 동동 가사와 조선시대 아박 정재의 진행 절차는 『악학궤범』 권5의 ‘아박조’에 기록되어 있다.
중종대에 동동 가사는 정읍 가사와 함께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여 폐기되고 선율만 남았다. 이후 영조대에 편찬된 『 대악후보』에 동동 악보가 수록되어 있는데, 13절의 가사 중 한 절에 해당되는 악보가 정간보와 오음약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악보에 가사는 생략되고 단선율과 장구 악보만 기록되어 있다.
동동 노래는 조선 후기에 소멸되었다. 이에 조선조 말 1893년(고종 30)에 공연된 아박 정재에는 동동이 반주하지 않고 정읍이 반주하였다. 조선조 말에 동동은 기악곡으로 변하여 지금은 피리가 주선율을 연주하는 관악 기악곡 동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악보는 『한국음악』 12와 『피리구음정악보』에 수록되어 있다.
동동 노래는 13절의 가사로 이루어져 있고, 『대악후보』에는 한 절의 선율만 기보되어 있다. 이것은 동동 13절의 가사가 각각 한 선율에 불리는 유절 주2의 노래라는 것을 의미한다. 제1절은 복을 기원하고 제2절부터 제13절까지는 일 년 열두 달을 각각 노래한다. 오음약보로 기보되어 있는 『대악후보』 동동의 악조는 계면조 5음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삼지정읍’이라는 용어에 의해 임종궁 계면조(林・無・潢・汰・㳞)로 해석된다.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기악곡 동동은 여덟 장단의 짧은 악곡이다. ‘수제천’과 장단도 같고 악기 편성도 같다. 한 장단 18박 장단으로서 소금 · 대금 · 향피리 · 해금 · 아쟁 · 장구 · 좌고로 편성되고, 악조는 7음계(黃 · 太 · 夾 · 仲 · 林 · 南 · 無)로 구성되었다.
동동이란 북치는 소리를 의성화한 것이라고 한다. 동동의 제1절~제3절의 가사와 번역은 아래와 같다.
기구(起句)
德으란 곰ᄇᆡ예 받ᄌᆞᆸ고 덕은 앞 잔으로 바치옵고
福으란 림ᄇᆡ예 받ᄌᆞᆸ고 복은 뒤 잔으로 바치옵고
德이여 복이라호ᄂᆞᆯ 덕이여 복이라 하는 것을
나ᅀᆞ라 오소ᅌᅵ다. 드리러 왔사옵니다
아으 動動 다리 아아, 동동다리
정월(丁月)
正月ㅅ 나릿 므른 정월의 냇물은
아으 어져 녹져 ᄒᆞ논ᄃᆡ 아아, 얼며 녹으며 하는데
누릿 가온ᄃᆡ 나곤 세상 가운데 태어나
몸하 ᄒᆞ올로 녈셔 이내 몸이여, 홀로 살아가는구나
아으 動動 다리 아아, 동동다리
이월(二月)
二月ㅅ 보로매 2월 보름에
아으 노피 현 아아, 높이 켜 달아맨
燈ㅅ블 다호라 등불 같으시도다
萬人 비취실 즈ᅀᅵ샷다 만인을 비추실 모습이시로다
아으 動動 다리 아아, 동동다리
(번역: 조규익. 출처: 조규익 · 문숙희 · 손선숙 · 성영애, 『동동(動動)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민속원, 2019). 이 책은 『대악후보』 동동 악보에 『악학궤범』 동동 가사를 붙여서 동동 노래를 복원하고, 그 노래로 『악학궤범』 아박 정재를 복원한 내용의 책이다.)
『악학궤범』에 수록되어 있는 동동 가사는 총 13절로, 기구(起句)와 함께 열 두달을 노래한다. 내용은 남녀간의 애정을 그리고 있으나, 『 고려사』 71권 속악조(俗樂條)에는 이 내용에 대해 주3의 말이 많으니, 대개 선어(仙語)를 본떠서 만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로 보아 고려와 조선 전기까지는 동동의 내용을 송도(頌禱)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대에 이르러 동동의 내용을 남녀상열지사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동동은 고려의 민간에서 유행하던 가요였으나, 궁중으로 유입되어 궁중정재로서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는 기악곡으로 연주되고 있는 유구한 무형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조선건국 초에 대부분의 고려 노래들이 음란한 소리〔哇淫之聲〕라는 이유로 퇴출되었으나 동동은 살아남았다. 중종 13년(1519)에 동동 가사를 퇴출시켰으나, 그 선율은 남아 기악곡으로 편곡되어 지금까지 연주되고 있다. 고려 민간에서 지어진 동동 노랫말은 높이 평가되어 아직까지도 수많은 문학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