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은 세종 29년(1447년)에 보태평 열한 번째의 끝 곡으로 등장한다. 세종 31년(1449년)에 종묘(宗廟) · 주1 · 공연(公宴)의 음악으로 정해져 예습되었으나, 연이은 세종과 문종의 국상으로 인해 잠시 단절되었다가 세조 6년(1460년)에 다시 재개되었다. 「역성」은 세조 9년(1463년) 11월에 주2에서 연주된 후, 그해 12월에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었다. 이때 제례에 맞게 편곡되면서 4언 12구의 가사가 4언 8구로 축소되고 주3 또한 임종궁평조에서 청황종궁평조로 4도 위로 이조(移調)된다.
일제강점기에 「역성」을 포함한 종묘제례악 전체가 리듬의 큰 변화를 겪는데, 원래 노랫말 구마다 박이 한 번 들어가고, 박 넷이 모여 한 장단을 이루는 규칙적인 리듬의 음악이 모두 일음(一音) 일박(一拍)의 불규칙적인 리듬의 음악으로 변화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변화된 「역성」이 현재의 종묘제례악으로 연주되고 있다.
『세종실록악보』 「역성」 노랫말은 한시(漢詩) 4언 1구, 12구로 되어 있고, 『세조실록악보』에는 4언 8구로 되어 있다. 한문 가사이지만 향악 장단을 가진 전형적인 향악곡으로 만들어졌다. 가사 네 구가 한 장단으로서 모두 3장단에 실려 있는데, 이 장단은 고려가요의 향악 장단이 확장된 것으로서 원 장단으로는 가사 한 구가 한 장단이 되어 모두 12장단이 된다.
세종대의 악조는 주4 평조(平調), 즉 임(㑣) · 남(㑲) · 황(黃) · 태(太) · 고(姑)의 5음계였으나, 세조대의 악조는 청황종궁 평조로서 황(潢)・태(汰)・중(㳞)・임(淋)・남(湳)의 5음계이다. 하삼(下三)-하사(下四)-하오(下五)로 향악의 계단식 종지형으로 종지한다. 「역성」의 한문 가사 한 글자는 한 박으로, 한 구는 한 마디가 되는 3분박 4박자 리듬으로 연구된 바 있다. 『세종실록악보』 「역성」 12구의 가사는 제8구의 여덟째 마디에서 제9구의 아홉째 마디로 6도 도약 진행하여 전대절과 후소절을 이룬다.
종묘제례 주5에서 연주되는 보태평의 마지막 곡 「역성」은 춤추는 기생이 춤을 마치고 물러날 때 연주되는 인출곡이다. 노랫말은 열성이 쌓은 덕으로 천하를 편안하게 하고 주6과 주7를 밝게 세우셨다는 내용이다.
『세종실록악보』 「역성」
천생열성(天生列聖) 하늘이 열성을 내시어
총수대동(寵綏大東) 우리나라를 총애하고 편안케 하시니
세덕작구(世德作求) 대대로 쌓은 덕에 부합되시며
솔유미공(率維敉功) 천하를 편안케 한 공이셨도다
공성치정(功成治定) 공이 이루어져 정치가 안정되고
신화미륜(神化彌綸) 신령스런 교화 두루 퍼졌으며
예악명비(禮樂明備) 예악이 밝게 갖추어지니
환호기문(煥乎其文) 빛나시도다 그 문채여! —-전대절
좌약우적(左籥右翟) 왼쪽은 피리 오른쪽은 꿩깃 들고
왈기구변(曰旣九變) 노래 곡조 이미 아홉 번 변하매
희희옹옹(凞凞雍雍) 빛나고 화평하며
진미우선(盡美又善) 완벽하게 아름답고 선하도다 —-후소절
『세조실록악보』 「역성」
세덕작구(世德作求) 대대로 덕을 쌓으며 구한 것은
솔유미공(率維敉功) 대개 오로지 어루만지는 공이로다
광천태평(光闡太平) 태평함을 빛내고 드러내시니
예악방륭(禮樂方隆) 예와 악이 바야흐로 융성해졌도다.
좌약우적(左籥右翟) 왼손에 약을 들고 오른손에 적을 쥐고
왈기구변(曰旣九變) 음악은 이미 구변을 아뢰며
식소광열(式昭光烈) 빛나는 공열을 밝히니,
진미진선(盡美盡善) 모두 아름답고 모두 훌륭하도다.
(번역: 조규익. 출처: 문숙희, 『종묘제례악의 원형과 복원』, 학고방, 2011)
「역성」은 한문 가사로 되어 있으면서도 전형적인 향악곡으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세종대왕의 향악에 대한 확고한 주체성과 그 시대 향악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노래이다. 세월이 흘러 세조대왕에 의해 편곡되어 제사 음악이 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또 다른 음악으로 편곡되었다.
현재의 「역성」은 이렇게 세종과 세조 두 대왕의 음악성이 들어 있고, 또 우리의 역사적 아픔과 후대 음악인들의 음악성이 녹아 있는 역사적인 노래이다. 그러나 현재의 「역성」은 세종대왕의 음악성과 향악 주체성을 드러내 보여 주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