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정재는 궁중연향에서 공연되는 악기연주·노래·춤으로 이루어진 종합예술이다. 정재는 재예를 바친다는 뜻으로 악기연주에 맞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공연물이다. 궁중정재 형식에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는 그 구별이 뚜렷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 차츰 경계가 모호해졌다. 조선 후기 당악정재는 죽간자가 무용수를 인도하는 것 외에 향악정재와 구별이 어렵다. 인조반정 이후 장악원 소속 여기가 폐지되어 궁중연향 때에 지방 여기가 와서 공연했다. 이것이 궁중정재가 지방 관아에서, 지방 정재가 궁중에서 공연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재(呈才)는 ‘재예(才藝)를 바친다’는 뜻으로, 악기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공연물이다. 정재의 형식에는 당악정재(唐樂呈才)와 향악정재(鄕樂呈才)가 있으며, 고려시대는 그 구별이 뚜렷하였다.
즉, 당악정재는 죽간자(竹竿子) 2인의 인도 아래 무용수가 등·퇴장하고, 공경의 표시로 죽간자가 진구호(進口號)·퇴구호(退口號)를 하며, 당악곡으로 반주하고 한문으로 된 창사(唱詞)를 노래한다. 향악정재는 죽간자 없이 무용수가 곧바로 등·퇴장하고, 공경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 엎드리며, 향악곡으로 반주하고 우리말 창사를 노래한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구분도 차츰차츰 경계가 모호해져갔다. 예를 들면, 『악학궤범(樂學軌範)』(1493년)에 향악정재로 소개된 향발에서 당악인 「보허자령(步虛子令)」이 연주되고, 한문 창사가 불리웠으며, 학무(鶴舞)와 문덕곡(文德曲)에서는 각각 당악인 「보허자령」과 「소포구락령(小抛毬樂令)」이 연주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서로 영향을 끼치며 변모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당악정재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포구락(抛毬樂)에서 당악만 연주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당악 「보허자령」과 함께 「향당교주(鄕唐交奏)」·「여민락령(與民樂令)」등이 연주되었다. 「향당교주」는 향악 「영산회상(靈山會相)」과 관련된 악곡이고, 「여민락령」은 세종 후기에 창제된 신악(新樂)이다.
당악정재 육화대(六花隊)가 만들어진 조선초기에는 당악 「천년만세인자(千年萬歲引子)」 「최자령(嗺子令)」 「중강령(中腔令)」등이 연주되었지만, 『갑오외진연시무동각정재무도홀기(甲午外進宴時舞童各呈才舞圖笏記)』(1894년) 편찬당시에는 「보허자령」「향당교주」가 연주되고, 가곡 「농(弄)」 「계락(界樂)」 「편(編)」에 맞추어 우리말 창사가 노래 불리웠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당악정재는 죽간자가 무용수를 인도한다는 특징 외에는 음악상으로 향악정재와의 구별이 어렵다.
한편 고려시대 이래 향악정재 아박(牙拍: 일명 동동(動動)·무고(舞鼓)에서 ‘德으란 곰ᄇᆡ 에 받ᄌᆞᆸ고’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로 시작되던 우리말 창사가 불리웠는데, 1829년(순조 29) 이후로는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지은 한문 창사가 불리웠다.
1073년(고려 문종 27)에 송(宋)에서 전래된 당악정재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가 처음 공연된 이후 포구락·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 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 등을 비롯한 여러 당악정재가 전래되어 공연되었는데, 이중 헌선도·수연장·오양선·포구락· 연화대(蓮花臺)만이 조선으로 전승되었다. 향악정재로는 아박· 무고· 무애(舞㝵)· 처용무(處容舞) 등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승되었다.
조선초기에 당악정재 곡파(曲破)가 복원되었고,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근천정(覲天庭)· 수명명(受明命)· 하황은(荷皇恩)· 하성명(賀聖明)· 성택(聖澤)·육화대와 같은 당악정재가 새로 만들어졌다. 조선에서 새로 만들었지만 당악정재로 불리는 이유는 죽간자의 인도로 무용수가 등·퇴장하고, 당악을 연주하며 한문 창사를 노래하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조선에 전승된 향악정재 중 무애는 1434년(세종 16)에 불가(佛家)와 관계된 정재라 하여 오랫동안 금지되었다가 1829년(순조 29) 6월 순조 40세 경축 진찬(進饌)에서부터 왕의 장수(長壽)를 비는 악장으로 바뀌어 다시 궁중에서 공연되었고, 그 나머지 아박·무고·처용무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공연되었다.
조선초기에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봉래의(鳳來儀)· 향발(響鈸)· 학무(鶴舞)·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 문덕곡(文德曲)과 같은 향악정재가 새로 만들어졌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수보록·근천정·수명명·하성명·성택·문덕곡·보태평·정대업 및 곡파가 더 이상 연향에서 공연되지 않았는데, 수보록은 도참(圖讖)과 관계되고, 근천정·수명명·하성명·성택은 명(明 1368∼1644)과 관계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며, 보태평·정대업은 선조대(宣祖代 1567-1608) 이후 제향에서만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하황은 또한 명과 관계된 내용이지만, 1743년(영조 19)에 영조가 시대에 맞게 새로 창사를 지었으므로 조선후기에 여전히 공연될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첨수무(尖袖舞)·검기무(劒器舞)· 선유락(船遊樂)· 관동무(關東舞)·사자무(獅子舞)· 항장무(項莊舞) 등이 새로운 궁중정재종목으로 추가되었고, 1828년(순조 28) 순원왕후(純元王后) 40세 경축 진작(進爵)과 1829년(순조 29) 순조(純祖) 40세와 즉위 30주년 경축 진찬(進饌)을 계기로 효명세자의 주도 아래 많은 정재가 창제되었다.
1828년에 창제된 정재로는 망선문(望仙門)· 경풍도(慶豊圖)· 만수무(萬壽舞)· 헌천화(獻天花)· 춘대옥촉(春臺玉燭)· 보상무(寶相舞)· 영지무(影池舞)· 박접무(撲蝶舞)· 춘앵전(春鶯囀)· 첩승무(疊勝舞)· 무산향(舞山香)· 침향춘(沈香春)·연화무(蓮花舞)· 춘광호(春光好)· 최화무(催花舞)·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고구려무(高句麗舞)·향령(響鈴) 등이 있는데, 이중 앞의 11개 정재의 악장은 효명세자가 지었다.
1829년에 창제된 정재로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제수창지무(帝壽昌之舞)· 사선무(四仙舞)가 있으며, 모두 효명세자가 악장을 지었다. 최화무와 가인전목단은 1828년에 만들어졌지만, 1829년에 효명세자가 새로 악장을 지어 재구성되어 공연되었으며, 고려에서 전승된 아박·무고·무애 또한 1829년부터는 효명세자가 새로 지은 악장이 불리웠다. 한편 향령은 1828년 창제 당시에는 춤만 추어졌는데, 1848년(헌종 14)부터 헌종이 지은 한문창사가 불리웠다.
검기무·선유락·관동무·항장무·사자무 등은 이전부터 지방관아에서 공연되던 것인데 궁중에 걸맞게 재구성되어 궁중연향에 편입된 것이다. 궁중연향 관련 의궤를 살펴보면, 검기무와 선유락은 1795년의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관동무는 1848년(헌종 14)의 『무신진찬의궤(戊申進饌儀軌)』에, 항장무는 1873년(고종 10)의 『계유진작의궤(癸酉進爵儀軌)』에, 사자무는 1887년(고종 24)의 『정해진찬의궤(丁亥進饌儀軌)』에 처음 기록되었다.
이렇듯 지방 관아에서 공연되던 정재가 궁중에서 공연되기도 했지만, 궁중정재가 지방 관아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이는 인조반정(1623) 이후 서울에 일정기간 상주하며 활동하는 장악원소속 여기(女妓)가 폐지되었으므로, 궁중연향을 베풀 때마다 지방에서 여기를 뽑아 올려 공연하게 하고, 연향을 마친 뒤에는 다시 지방으로 내려 보냈던 선상기(選上妓) 제도 덕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