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용(朴文鎔, 1882~1929)은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으로, 본관은 진원(珍原), 이명(異名)은 박환(朴桓)이다.
1913년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면장으로 재직하였다. 1914년 11월경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北京〕에서 진문대학을 다녔고, 톈진〔天津〕에서 『 신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7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노동총판인 안창호와 회견하고 그해 말 경성에 들어왔다.
1920년 2월에 한우석과 함께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인 김철과 회견하고 경성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필요한 권총을 빌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3월에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조선독립군사령부 조직에 나섰다.
6월에는 전라남도 광주군(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권총을 휴대하고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같은 해 8월 미국 의원단이 경성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 등을 제거할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한우석이 검거됨에 따라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 자신도 체포되었다.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 예비 및 제령(制令) 제7호 위반과 총포 화약류 취체령 위반, 사기죄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