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 서는 것을 ‘보두다’라고도 한다. ≪민법≫에서는, 먼저 주채무자에게 채무이행을 청구한 다음 보충적(2차적)으로 보증인에게 변제를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보증인은 주채무가 무효·취소·불성립 등으로 없어지면 보증채무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고[附從性], 주채무자보다 먼저 변제하라고 하면 1차로 주채무자에게 변제청구를 한 뒤에라야 2차적으로 변제하겠다[補充性]고 하거나, 먼저 주채무자의 재산이 있는 한 못 갚겠다는 등의 거절을 할 수 있다[催告·檢索의 抗辯權].
고조선시대에는 ≪한서≫에서 이른바 <8조금법>의 하나로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奴)로 하여 그 집에 몰입(沒入)하고, 여자는 비(婢)로 하여 피해자의 집에 몰입한다. 스스로 풀려나려면 50만으로 한다.”고 하여 재물의 벌금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자신의 신체가 노비로 되어 채권의 만족을 주게 하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주서 周書≫ 이역전 고(구)려조에 의하면, 만약 빈곤하여 배상할 수 없는 경우에는 (공)사채(私債)를 부담한 자와 함께 그 자녀를 노비로 하여 갚게함으로써 사채무 불이행시는 주채무자와 그 자녀의 신체가 2차적으로 노비가 되어 채권만족을 주게 하는 인질제도가 있었다.
또한 ≪당서 唐書≫ 동이전 신라조에 보면 “……재상가에서 이자놀이 쌀과 곡식을 사람들에게 준 뒤에 갚지 않으면, 고공살이에 만족하지 않고 노비화시키므로……”라는 기록으로 보면, 삼국시대 전후에는 인질제도로서 채권변제를 확보하는 인적 보증제도가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 지(志) 권33 식화지2 차대조(공민왕 원년) 2월에 “빈민이 자녀를 팔고 3년이 지났으므로, 석방하여 돌려보내지 아니한 자는 엄히 죄를 다스리라.”는 기록과 공민왕 5년 6월에 “가난한 사람은 아침에 저녁거리를 기약할 수 없어 자녀를 전매(典賣)하니 심히 슬프다(貧民不謀夕典賣子女甚可哀).”는 경우 및 “1375년 이전에 자녀를 전당(典當)한 것은 오래되었거나, 오래되지 않았음을 논함이 없이 모두 되돌려보냄을 허락한다(典當子女無論久近並許放還).”는 왕명이 나온다.
이러한 ‘전당’이나 ‘전매’ 등의 전(典)은 채권확보를 위하여 물건을 잡힌 뒤에, 원리금을 주고 다시 찾아오는 물적 담보제도이나, 이 때는 사람의 신체를 잡힌 것이므로 인질인 인적보증제가 되며, 이를 금지하는 왕명과 기록이 많이 나오므로, 실제는 먹고 살기 위하여 자녀의 신체를 잡히는 경우가 적지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관습상의 보증 및 공동보증제도, 법규정상의 보증연대제도, 불법적인 사회적 폐습으로서의 보증연대(인징, 동징, 족징)제도 및 인질제도 등이 있었다.
(1) 관습상의 보증제도
계약서상의 ‘보증인’의 명칭은 조선조의 실정법 속에는 군사상 군보(軍保)·보인(保人, 즉 奉足)의 뜻으로 보이고 보석[保放]·공무원추천보증[保擧] 등의 공법상 보증제도가 있다.
그러나 개인간의 채권·채무를 보증하는 경우는 돈이나 곡식을 빌릴 때 각종의 논·밭인 토지와 집[家舍]·나무·집기·노비 등을 팔고 사고 잡히고 하여, 그 계약서[明文]나 상속문서[衿記], 재산증여문서[別給·許與文記] 등에 보(保)·보인(保人)·증보(證保)·증보보인(證保保人) 등의 보증인을 뜻하는 명칭을 기재한다.
또, 보증인이라는 명칭은 1889년의 경기도 관초(關草)를 보면 보인과 보증인이라는 명칭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으므로 대략 1880년대 전후로 하여 보증(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그 전에는 보·보인·증보·증보보인 등이 보증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자료로서는 1880년(고종 17)경에 작성된 판결문 초록을 보면, “보증선 일이 비록 실수이더라도 보인이 담당해야 되고, 주채무자[債用當者]의 간 곳을 모르면, 보증선 사람[懸保人]이 갚는 것이 당연한 즉, 즉시 받아내어 다시는 분란의 폐가 없도록 할 일”이라는 사법적 해석상에서는 보인이란 2차적 책임을 지는 보증인임을 알 수 있다.
1898년의 전당포규칙에는 ‘보증인’을 쓰고 있고, 1905년의 <형법>에는 범인이 도망가면 보석을 보증한 보증인을 보인으로 기재하고 책임을 지우고 있다.
관습상의 계조직(稧組織)·사창(社倉)·의창(義倉)에서의 공동보증관행은 한말의 계통문(稧通文)을 보면, 종계(宗稧)로부터 곡식과 돈을 빌릴 때 계원들끼리 서로 보증을 서고 있는 드문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때 두 사람 이상의 계원간에는 서로 보증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동보(同保)’·‘호보(互保)’·‘상보(相保)’ 등의 명칭을 사용한다.
이 때에 두 사람 사이에는 한 사람이 빌린 곗돈이나 곡식을 못 갚을 때, 다른 한 사람이 다 갚는다면 보증책임을 부담하게 되고, 세 사람 이상 사이에는 빌린 주채무자가 못 갚으면 나머지 사람들이 균등하게 부담하는 공동보증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창 등의 경우는 1445년(세종 27) 7월 23일의 ≪세종실록≫을 보면, “사창을 창설하고 의창의 곡식을 빌려줄 때, 10명이 한 보가 되어 서로 보증을 서고, 그 중에 도망간 사람의 몫은 같은 보증인[同保]이 균등하게 준비하여 부족액을 납부할 것”이라는 기록이 있어, 사창·의창에서도 곡식을 빌릴 때 공동보증제도를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법적 보증연대관행은 이른바 인징(隣徵)·족징(族徵)·동징(同徵) 등으로서, 가난하여 국가나 개인으로부터 빌려 먹은 곡식이나 돈을 갚지 못하고 도망가거나 죽어버리면, 그 사람의 몫은 이웃, 친족, 동네사람 등에게 2차적으로 연대하여 부담시키는 악습이었다.
1664년(현종 5) 11월에는 “공채(公債)를 갚지 못하면 친부자간 이외의 친족에게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왕명이 정식으로 되어 합법적인 채권만족의 수단으로 용인되고 있었다.
1705년(숙종 31)에는 채권[徵債]만족방법으로 “부자 이외에 형제에게 침해하지 못한다.”는 규정과 위의 두 규정을 종합하여 1711년에는 “공·사채는 먼 친족 및 동거인에게 일체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고, 이 조문이 ≪대전회통≫에도 그대로 명문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금지규정이 있는 데 반하여, 위반행위는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불법적인 보증연대책임인 악습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특히 관리가 공채징수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는 규정이 병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채의 경우를 보면 1492년(성종 23)의 ≪대전속록≫의 규정에서, 국고금을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유용(流用 : 횡령)한 아전·창고지기 등에게 형벌을 가함은 물론이고, 공채권을 완전히 만족받을 때까지 그들의 신체를 유치하고 구금하는 인질제도를 허용하고 있다.
특히, 왕명으로 600냥 이상, 1684년 9월에는 100냥 이상을 변제하지 못하면, 전가족이 정배(定配), 구금되고 그의 아내와 자식이 완전히 다 갚을 때까지 노비가 되는 제도를 만들었다.
(2) 법정보증연대제도
공채 및 개인간의 매매·대차관계 등으로 생긴 오래 묵은 채무에 대하여 주채무자가 사망을 하면, 그 채무자의 처자나 재산에 대해서 채권의 만족을 받도록 하는 법규정상 당연히 인정되는 법정당연사망대상(法定當然死亡代償)의 보증연대책임이 발생한다(負公私債者雖身死妻子財産者許徵). 이는 ≪경국대전≫ 규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공채의 경우는 1492년의 ≪수교집록 受敎輯錄≫의 규정에 의하면, 주채무자의 사망으로 보증연대책임이 면제되고, 사채의 경우는 1746년의 ≪속대전≫의 규정에 의하여 이자채무만 면제시킨다.
그러나 1727년의 ≪신보수교집록≫의 규정에 의하여 주채무자의 처자가 책임을 부담하는 기간은 공채는 15년, 사채는 20년으로 한정하여 ≪경국대전≫ 이후의 무기한부 책임이 기한부 책임으로 변화, 발전하게 됨을 본다.
(3) 인질제도
≪대명률≫ 호율(戶律)을 보면, “재물을 받고 (자기의)처첩을 남의 처첩으로 만들어주기로 허락하면[典雇] 곤장 80이고, 재물을 받고 딸을 타인에게 잡히면[典賣] 곤장 80에 처한다.”는 규정이 ≪백헌총요 百憲總要, 要集≫에도 같은 뜻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보수교집록≫ 호전 징채조에 보면 “사채로 인하여서는 양인(良人)인 채무자의 자녀를 노비로 하는 것을 금지……” 하여 처벌하는 규정이 1664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1711년의 ≪수교집록≫을 보면, 600냥 이상의 공금 등을 못 내면 양인, 공·사천(公私賤), 상인(商人), 일정한 공무원의 아내와 자식의 신체가 돈 빌린 관가에 소속된 노비로 되게 하고, 빌린 채무를 다 갚을 때까지 부려먹는 것으로 채권을 만족하게 하는, 공채무 완전변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인질제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계약서상의 관행 등을 보면, 사채로 노비를 매매하는 형식으로 잡힌 뒤, 뒷날 찾아오는 양도질의 매도담보형태의 인질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또한 양인의 자녀는 노비로 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양인신분만은 유지하면서 채무의 변제를 위한 담보로 잡히는 매도담보형태를 이용하고 있다.
이상으로 우리 민족의 법률문화 중 보증이라는 면만 간단히 살펴보았으나, 왕권체제하에서 흉년·가뭄·기아·질병 등 인위적·자연적으로 어려울 때의 보증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여, 속담에도 ‘빚 보증하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는 말이 있듯이 가능한 한 남의 보증을 서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으며, 개인주의사상이 발달할수록 더 심대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