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지역 고분군 ( )

고대사
유적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능산리 · 능안골 · 정동리 등의 무덤군.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능산리 · 능안골 · 정동리 등의 무덤군.
개설

충청남도 부여군은 백제시대의 사비(泗沘) 지역으로 서기 538년부터 660여년까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다. 웅진(熊津)에서 중흥을 이룬 백제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사비로 천도하면서 부여지역에는 정연한 도시 시설과 함께 왕궁 등의 각종 시설이 갖추어졌다. 부여지역에는 백제가 약 130여 년간 도읍지로 기능하면서 당시에 만들어진 각종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특히 왕실을 비롯한 귀족과 평민들의 무덤이 대량으로 소재하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에 자리한 왕릉 군집으로서 능산리고분군이 있으며, 능산리에 이웃한 능안골 등지에 지배층의 무덤으로 볼 수 있는 고분군이 자리한다. 그리고 염창리 등지에 대규모의 고분군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사비 도읍기의 백제 고분문화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이밖에도 부여지역에는 사비가 백제의 도읍지로 택정되기 이전에 조성된 무덤들도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도읍지 외곽에 잔존한다.

내용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침공으로 부득이 금강유역의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고, 60여 년간 웅진지역에 정주하면서 중흥을 이룩한 이후 보다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538년 사비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백제의 사비천도는 웅진시대 무령왕대를 거쳐 성왕대에 이르러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진행된 계획된 천도였으므로 도읍지 사비는 준비된 도시였다. 백제는 130여 년간 사비에 도읍하면서 다양한 고분군을 남겼는데, 고분분포에서 확인되는 특징은 매장주체인 고분군은 도성(都城) 밖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부여지역 고분군의 분포를 살펴보면, 백제 도읍지에 걸맞게 능산리고분군을 위시하여 능안골고분군, 정동리고분군,염창리고분군 등이 동쪽의 나성(羅城) 밖에 형성되어 있다. 또한 외산면의 수신리·문신리 등과 임천면의 민사리·발산리·칠산리 등지의 고분군은 서쪽 구역에 분포된 고분군이다. 부여에서 확인된 백제고분군 가운데 천도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고분군은 외곽지역에서 일부 흔적이 확인되는데, 초촌면 소사리 움무덤〔土壙墓〕유적, 초촌면 증산리 분구묘(墳丘墓) 유적과 분강·저석리 유적의 돌덧널무덤〔石槨墓〕과 초기 돌방무덤〔石室墳〕, 그리고 독널무덤〔甕棺墓〕등이 있다. 이밖에 백제 말기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화장묘(火葬墓)가 중정리 등지에 남아 있다.

부여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이미 1917년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능산리고분군에 대한 조사가 바로 그것으로 백제 왕릉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초의 조사는 서고분군(西古墳群)으로 분류된 6기에 대해 진행되었는데, 조사를 통하여 백제 왕릉으로 분류되었다. 1940년대에는 동고분군(東古墳群)으로 분류된 10여기의 돌방무덤들이 조사됨으로써, 부여지역 백제고분에 대한 실상이 구체화되었다. 이후 간헐적인 수습조사를 거쳐 1970년대 소사리고분군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1980년대에 정암리 등지의 백제고분군이 조사되었다. 이어 1990년대에는 대규모 고분군인 능안골·염창리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아울러 증산리나 합정리 등지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부여지역의 백제고분의 진면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부여 고분군의 분포범위는 도성의 범주 외곽에 해당하는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고분의 유형은 대체로 사비천도 후에 사용되는 돌방무덤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 속에 돌방무덤 다음에 등장하는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 石室墓〕이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 천도 전의 무덤들인 분구묘와 움무덤이 사비지역 외곽에 산재되어 있고, 도성 내의 중정리 등지에서 화장묘가 발견되었다. 이로써 보면, 사비도읍기의 백제고분군은 도성 밖에 배치되었다는 특징과 함께 사용된 무덤은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주종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사비천도 이전에 부여지역에서 조영된 고분군 가운데 소사리유적의 움무덤은 목관 혹은 목곽이 없는 순수한 움무덤으로 지반토를 굴착하여 만든 토광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증산리유적의 분구묘는 경사면에 중복 없이 밀집 분포하는데, 매장시설은 확인되지 않지만 도랑〔周溝〕의 형상이 분명하다. 이외에 저석리고분군의 돌덧널무덤이나 초기 돌방무덤에는 벽돌덧널무덤〔磚槨墓〕외에 돌덧널〔石槨〕내에 독널〔甕棺〕을 안치한 것도 있다. 분강리·저석리고분군에서 발견되는 초기 돌방무덤은 반지하식의 묘광에 평면 방형의 묘실, 그리고 입구가 벽체의 중간쯤에 시설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사비천도 이후에 조성된 대부분의 부여 고분군은 돌방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제의 돌방무덤은 묘실 평면, 천정 가구형태, 입구의 시설방식, 연도(羨道)의 규모나 형상에 따라 8가지로 나뉘는데, 부여 고분군은 터널식과 고임식, 그리고 수평식 유형이 중심을 이룬다. 터널식은 능산리고분군의 중하총(中下塚)이 대표적 사례인데 묘실 평면이 장방형으로 조성되고, 벽체 전·후의 단벽은 수직으로, 좌·우의 장벽은 상단에서 오므려 맞닿게 한 형식이다. 입구를 대부분 개구식으로 조성하였으나 문틀식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여 고분군은 터널식 다음에 등장하는 고임식이 주류를 이룬다.

능산리 백제 왕릉을 비롯하여 능안골고분군이나 염창리고분군 등의 무덤이 대부분 고임식이다. 고임식은 묘실 천정이 평천정으로, 벽체 상단에 안으로 경사를 둔 고임석을 올린 후에 수평의 평천정을 구성하였다. 고임식은 백제 사비도읍기 돌방무덤의 대표적 유형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밖에 동하총(東下塚)은 고임식이 발전된 수평식의 구조를 갖추고 있고 벽화가 남아 있기도 하다. 한편 염창리고분군, 정암리고분군은 앞트기식 돌방무덤으로는 묘제 유형도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한쪽 벽면 전체를 개구(開口)하여 입구로 사용하는 묘제로서 돌방무덤이 변화된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더불어 백제 말기에 사비의 도읍지역 내에 매장된 화장묘는 장골용기를 지하에 안치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부여 고분군은 백제가 사비에 도읍하던 시기에 조영한 고분군을 비롯하여 천도 이전의 고분군을 망라하고 있다. 이들은 백제의 사비도읍기 고분문화를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서 도성의 외곽에 자리한다. 아울러 부여 고분군의 묘제는 돌방무덤으로 통일되어 있으면서도 웅진도읍기 이후에 변화·발전된 묘제 양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특히 돌방무덤이 터널식에서 고임식으로 변천되어 백제 고유의 석실묘제가 정착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천도 이전의 고분 분포 모습을 통해 사비가 도읍으로 확정된 이후부터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드물게 확인되는 화장묘를 통하여 백제사회에 성행한 불교의 흔적과 묘제의 변천상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고분』(김원룡,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백제고분연구』(강인구, 일지사, 1977)
『백제석실분연구』(이남석, 학연문화사 1995)
『大正六年度古蹟調査報告』(朝鮮總督府, 1920)
『昭和六年度古蹟調査報告』(朝鮮總督府, 1935)
「백제고분의 연구」(안승주, 『백제문화』 7·8합집, 공주대학교백제문화연구소,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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