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사명대사 생가지(密陽 四溟大師 生家址)는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고승인 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는 1544년(중종 39)에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에서 교생(校生)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장악원(掌樂院) 정(正)이 된 후 대구 수령으로 있다가 그후 밀양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유학 임종원을 낳고, 임종원은 교생 임수성을 낳았다. 본관은 풍천 임씨(豊川任氏)이다. 속명은 유정(惟政) 또는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13세 때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에게서 글을 배우다 그만두고, 직지사(直指寺)로 가서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서 머리를 깎고 선문(禪門)에 들어갔다.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하던 중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義僧兵)을 모아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宣祖)는 그의 공을 크게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으며, 일본과 강화(講和)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되어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조선인 3,500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嘉義)의 직위와 어마(御馬) 등을 하사받았다. 이후 병을 얻어 해인사(海印寺)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광해군 2)에 설법을 마치고 세상을 떴다. 저서로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등이 있다.
사명대사의 생가터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 일대나 422번지 일대의 두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 곳 가운데 현재 학계에서는 399번지 일대가 더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그 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 볼 때 399번지를 축으로 하여 뒷산의 주맥(主脈)이 흘러 내려오고 있으므로, 밀양에 터를 잡은 사명당의 증조부인 임효곤이 이곳에 터를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자연마을의 생성 측면에서 볼 때 입향조(入鄕祖)인 임효곤의 관직으로 보아 반가(班家)의 터전을 형성할 지역으로 422번지 일대는 너무 좁다. 셋째, 문헌 기록으로 볼 때 사명당의 어릴 때 생활을 기록한 것에 의하면 집 가까이에 연못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로 보아 399번지 일대가 가능성이 더 높다. 넷째, 현장의 지표 조사에서 볼 때 399번지 일대에서 기와 파편, 생활용품 파편 등이 발견되었으며, 건축물의 유구로 보이는 담장 흔적들도 발견되었다.
생가터는 밀양과 창녕의 경계를 이루는 영취산(738.8m)의 동남쪽 자락에 정남향으로 위치한다. 3동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성은 삼(三)자형이며, 대문채는 동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는 전후에 나란히 배치하였다. 솟을대문에는 온돌방과 고방(庫房) 및 외측을 두었다. 사랑채는 전면 5칸, 측면 1.5칸의 툇집으로 구성하고 2칸 사랑방을 중심으로 동쪽 편으로 전후 2칸의 누마루를 만들고 사랑방 서쪽으로는 중문간과 고방을 두었다. 방의 전면에는 퇴를 마련하고 전면 창호 아래에는 머름을 두었다. 누마루의 앞과 옆에는 계자각(鷄子閣) 난간(欄干)을 돌렸다. 안채는 전면 5칸, 측면 1.5칸으로 서측에 1칸의 부엌, 2칸의 온돌방, 1칸 마루, 1칸 건넌방을 차례로 배치하였고, 방의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방의 후면으로는 모두 벽장을 두었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남부지방 상류주택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사명대사 생가지는 사명대사가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으로, 가끔 부모의 선영을 찾은 곳이다. 생가는 그러한 행적을 기억할 수 있도록 대사의 격에 맞도록 복원한 조선 중기 반가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