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坡平尹氏) 대언공파(代言公派) 16세 윤자선(尹孜善, 호 화곡(華谷))은 합천 묘산에서 세거(世居)하였는데, 조선 세종(世宗) 때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역임하고, 1450년(세종 32)경 거창 양항리에 입향(入鄕)하여 강학(講學)을 위해 심소정(心蘇亭)을 건축하였다. 심소정은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화곡의 직계 주손 20세 윤경남(尹景男, 1556~1614, 호 영호(瑩湖))은 임진왜란 때 자택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김면(金沔)의 휘하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후 44세에 장수현감(長水縣監), 54세에 개령현감(開寧縣監), 57세에 운봉현감(雲峯縣監)을 지냈고, 대사헌(大司憲)으로 추증되었다. 영호의 직계 주손 31세 윤철수(尹哲洙)와 인척인 30세 윤인하(尹寅夏)가 1919년 심소정에 이 지방의 유림(儒林)들과 함께 모여 ‘파리장서거사(巴里長書擧事)’를 논의하였다. 이 사건으로 투옥되는 풍파지변(風波之變)을 당해 종가(宗家)가 매도될 위기에 처하자 윤인하의 아들인 31세 윤조수(尹祚洙)가 종가를 매입하였고, 그 증손인 34세 윤헌효(尹憲孝)가 영호 생가를 지키고 있다. 따라서 화곡이 1450년경에 입향하여 어느 시기에 주택을 건축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집은 영호가 태어난 생가로서, 1556년(명종 11) 이전에 건축된 조선 전기의 주택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거의 동시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대문채, 중문채, 고방(庫房)채, 가묘(家廟), 장판각(藏板閣) 등은 후대에 점진적으로 건축된 것으로 파악된다.
거창의 북쪽 덕유산에서 내려온 능선인 박유산(712m)이 거창읍 들판의 동쪽에 위치하는데, 그 산자락 아래의 서향한 터전에 윤경남 선생의 생가가 있다. 집 앞에는 대곡천이 흐르는데 이는 약 500m 아래에서 황강을 만난다. 그 앞의 높은 언덕에 입향조(入鄕祖)가 건축한 심소정이 있다. 주택의 배치는 각각 ㄱ자형인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 마당과 안마당을 이루고, 남쪽으로 사당(祠堂)의 영역이 있다.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로 튼ㄷ자형의 사랑 마당을 구성하고, 중문채, 안채, 고방채로 튼ㅁ자형의 안마당이 만들어지며, 고방의 담장 남쪽으로 서향한 사당 및 장판각의 영역이 있다. 이는 안채와 사랑채의 二자형을 기반으로 튼ㅁ자형을 이루는 남부 지방의 기본적인 구성보다 복잡한 배치이다. 서향한 대문채와 중문채는 직선 축으로 배치되어 있고, 대문채는 3칸의 솟을대문, 중문채는 3칸의 평대문이다.
대문과 중문 사이에는 넓은 사랑 마당을 두고 북쪽으로 ㄱ자형 평면의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의 서쪽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남쪽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구성이다. 사랑채는 1m의 높은 기단 위에 놓인 2칸의 온돌방을 서향하게 두었고, 남향한 팔작지붕 아래의 공간은 2칸의 대청마루로 구성하였다. 이 마루는 지면에서의 높이가 193㎝로, 지면의 경사와 방향의 한계를 극복한 뛰어난 구성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누정의 건축 기법을 주택의 건축 공간에 적용한 것으로, 입향조인 화곡이 1450년경 지은 심소정과 유사한 형식으로 지어졌다. 외부를 접한 마루의 3면에는 동마루를 달아 계자각(鷄子閣) 난간(欄干)을 두른 화려한 구성이며, 홑처마이지만 추녀를 길게 빼어 낙수(落水)로부터 난간을 보호하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매우 높고 날렵한 외관이다. 대청의 천장은 3량(三樑)의 보에 판대공(板臺工)을 세우고 종도리에 짧은 왕지도리를 짠 후 추녀를 올린 구조인데, 추녀 양 옆으로 선자연(扇子椽)을 정교하게 대어 단부의 한 칸 천장을 모두 선자연으로 구성한 화려한 목구조이다. 온돌방의 남쪽 단부(端部)에는 맞배지붕 도리 뺄목의 끝에 활주(活柱)를 세워 툇마루로 구성한 독특한 공간이 있다. 이는 한옥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구성으로 조선 전기에 이러한 공간적 변형을 구성한 것은 매우 특이한 사례인데, 이러한 공간 구성은 안채의 남쪽 단부와 서쪽 단부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어 이 주택에서는 세 군데에서 나타난다. 지붕의 구성은 남쪽면이 맞배이며, 서쪽면은 팔작으로 뒷면의 모서리 부분은 우진각(隅進閣)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처마선이 같은 높이에서 수평으로 이어지는 구성을 ‘우산각집’이라고 한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높은 사랑 마당의 동쪽으로 높은 석축을 쌓고 안채 마당을 조성한 남쪽에 위치한다. 중문의 양 옆으로는 고방과 디딜방아칸을 두었다. 중문의 정면에 2칸의 고방채를 북향으로 두어 안채 영역의 작업 공간을 모아 두었다. 안채는 넓은 안마당을 두고 사랑방의 후면을 향하여 나란히 앉아 있는데 역시 ㄱ자형의 평면으로 구성으로 지붕은 모두 맞배로 구성하였다. 서향한 안채의 정침(正寢)은 안방, 2칸 마루, 건넌방으로 구성하였고, 서쪽으로 내려오면서 남향한 익랑(翼廊)은 2칸 안방, 2칸 부엌, 1칸 아랫방으로 구성하였다. 아랫방은 며느리가 사용하는 방으로 남쪽 단부에 툇마루를 붙이고, 사랑채 쪽 퇴(退)의 측면에는 심벽(心壁)을 조성하여 막았다. 내외벽(內外壁)을 조성하여 외부의 사랑채 쪽 시선을 차단한 고급진 구성이다. 부엌 위에는 안방에서 반턱 사다리로 올라가는 다락이 있는데 부엌 위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며, 아래칸 부엌 위의 공간은 바닥을 조금 높게 하였고, 공간의 일부를 아랫방의 벽장으로 사용하도록 분할하여,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도록 복합적으로 구성하였다. 2칸으로 이루어진 안방의 중간 기둥은 정침의 도리와 익랑의 도리가 직각으로 만나는 곳인데, 각 도리의 높이가 다르다. 이는 지붕의 높이 차이로 이어져 익랑의 용마루와 정침의 도리가 같은 높이에서 만나는 ‘서산각집’의 구조가 된다. 이러한 구조 형식은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안동 및 경주 지방의 구자형(口字型) ‘뜰집’에서 많이 보이는 구조로 경상좌도(慶尙左道)인 거창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사례이다. 다양한 지방에서 현감을 지낸 입향조 화곡 혹은 그 후손이 경상우도의 목수를 불러 적절한 규모의 건축 형식을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중앙에서 벼슬을 한 사대부(士大夫)의 반가(班家)는 건축의 유형적 · 구조적 지역성을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안동에서 목수를 불러 건축한 ‘구례 운조루 고택(求禮 雲鳥樓古宅)’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생가의 고방 남쪽 담 너머 가묘가 있다. 이는 낮은 담장을 삼면으로 두르고, 전면 3칸, 측면 1.5칸의 전면에 툇간을 둔 사당이다. 각 칸의 전면에 궁판(穹板)을 둔, 2짝의 여닫이문을 달았다. 기단은 높이 쌓았는데, 이를 시멘트로 포장하면서 전면의 공간을 앞으로 넓혔다. 이로 인해 처마선보다 더 나온 기단 위로 빗물이 떨어져 툇기둥을 상하게 하고 있다. 이 툇기둥은 방주(方柱)로 머리에는 보아지로 굵은 원형의 보를 받혔다. 그 보 위로 도리를 올려 덧도리 구조로 구성하였다. 가구(架構)는 3량이고 서까래는 홑처마이며 맞배지붕으로 구성하였다. 사당 옆의 장판각에는 ‘윤주하(尹胄夏) 교우문집(膠宇文集) 목판’(시도 유형 문화재, 1987년 지정) 427매와 문집 10권이 소장되어 있으며, 『영호문집(瑩湖文集)』에는 「모계수기략(茅谿手記略)」, 「산서잡록초(山西雜錄抄)」, 「김문충공개록장(金文忠公開錄狀)」 등이 실려 있다.
거창 윤경남 선생 생가는 조선시대 전기에 조성된 상류층의 주택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ㄱ자형 평면 구성은 一자형이 일반적인 이 지방에서 거의 보기 드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이 건물들을 중심으로 솟을대문, 중문, 고방, 사당 등이 배치되어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사랑채의 누마루에는 정자(亭子)의 공간 기법을 적용하였고, 지붕은 팔작과 맞배가 이어진 우산각집이다. 안채의 다락 공간은 경상우도의 반가인 뜰집에서 사용된 건축 기법을 도입한 구조로 지붕은 서산각집이다. 따라서 이 주택은 다양한 공간의 기법들이 사용된 것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있는, 조선 전기 상류층 주택의 백미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