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晉州姜氏) 소감공파(少監公派) 13세 강정(姜汀, 1546년생)은 진주 오동촌에 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진주교수(晉州敎授)를 지내고 의령군 화정면 화양리의 장박마을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들 강경손(姜慶孫, 1561년생)은 임진왜란에 참전하였으며, 이 마을로 이주한 입향조(入鄕祖)이다. 21세 강지황(姜志璜, 17351819)은 셋째 아들로 서쪽으로 약 8㎞ 거리의 덕교리로 분가하여 이 집을 지었고,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 받았다. 그의 증손인 24세 강봉위(姜鳳渭, 18251891)는 호(號)가 사이재(四而齋)이며 동지동녕부부사(同知東寧府府使)를 지냈다.
의령 덕교리 강씨 고가(宜寧 德橋里 姜氏 古家)는 19세기 초에 강지황이 세웠고, 1927년에 사랑채를 중창(重創)하였다. 1989년 화재 이후 안채를 중수(重修)하였다.
덕교리는 의령의 북서쪽 큰 산인 자굴산(896.9m)의 자락이 남쪽으로 내려와 서쪽의 진주와 경계를 짓는 방갓산(38.13m) 아래의 동사면에 자리한 주택이다. 주택의 배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좌향에 따라 동향하였고, 대문 앞에는 소하천을 두고 있다. 동서로 긴 대지의 대문은 담장으로 높게 둘러싼 입구의 골목 안쪽에 있다. 약 17m의 길이로 직선화되어 있는 담장은 이 주택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요소이다. 담장 양쪽의 공간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대문채, 사랑채, 중문(中門)채, 안채로 이루어져 있는 三자형 구성에 안채 남쪽으로 고방(庫房)채가 붙어 있는 구성이다.
대문채는 전면 5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으로 지붕의 양 단부(端部)는 우진각 지붕이다. 중앙에 있는 대문간의 남쪽 공간은 온돌방과 부엌 칸으로 이루어져 있고 북쪽 공간은 모두 헛간으로 구성하였다.
사랑채는 넓은 마당을 두고 대문채의 정면에 위치한다. 정면 6칸, 측면 1.5칸 공간이지만, 중앙의 4칸을 맞배지붕으로 구성하고 양 단부의 1칸씩의 공간은 부섭지붕으로 덧달아 놓은 모양이다. 이 단부의 공간은 폭이 중앙 칸의 0.8, 0.9배의 폭으로 조금 좁은 구성이다. 사랑채의 중앙은 전면에 툇마루로 구성하고 2칸 마루와 2칸 사랑방을 두었다. 남측 단부의 공간은 전후(前後)의 길이를 같이 구성하여 측면 2칸을 만들고, 전면은 마루, 후면은 온돌방으로 구성하여 이 방을 약방이라 불렀다. 사랑채의 북쪽도 이와 같은 구성으로 전후의 깊이가 같은 겹집 구성으로 만들고, 전면에 책방, 후면에는 사랑 부엌을 개방적으로 만들었다. 사랑방과 마루 한 칸의 후면에는 벽장(壁欌)을 달았는데, 마루의 벽장은 위패를 모시는 감실(龕室)이다. 사랑방과 마루 측벽 및 후벽 문의 하부에는 모두 머름을 두어 장식적으로 구성하였고, 방과 마루 사이의 문은 3분합(三分閤)을 열어 들개문으로 구성하여 행사를 할 때 개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사랑방 전면의 창호 위에는 환기창을 두었고, 그 앞 툇마루 2칸의 천장은 우물반자로 미려(美麗)하게 조성하였다. 이러한 기법은 근대적 특성이라 볼 수 있다. 사랑채의 기단은 사괴석으로 세벌대의 단으로 높게 쌓았고, 초석(礎石)은 사암 재질의 방형 초석을 사용하였으며, 기둥은 모두 방주(方柱)이다. 보는 툇마루에 충량(衝樑)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 월간보[越間樑] 형식으로 보내고 보아지를 받혔다. 재료의 풍부함이 보인다. 주두는 대부분 도리와 보의 높이가 같은 납도리 구조로 구성하였는데, 맞배지붕을 구성하는 양 단부의 기둥머리에는 도리가 보보다 높은, 덧도리 구조를 구성하였다. 가구는 3량(樑)에 판대공을 받쳤고, 홑처마로 구성하였다.
사랑마루의 상량(上樑)에는 상당히 연대감이 있는 묵서(墨書) 기록이 있는데 ‘숭정기원후육정묘이월이십팔일입주삼월초상량(崇禎紀元後六丁卯二月二十八日立柱三月初上樑)’이라 되어 있다. 숭정기원(무진년, 1628년) 후 육정묘(六丁卯)는 1987년으로 이 묵서의 세월감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숭정기원의 1년 전이 정묘년(丁卯年)이므로 한 번 더 계산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부분의 건축 양식이 20세기 전반의 건축적 특성을 보여 주고 있어 1987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사랑채의 묵서명(墨書銘)의 연대는 ‘숭정기원후오정묘년’인 1927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전면 6칸, 측면 1.5칸의 기본 구성에 좌우와 후면에 각각 반 칸씩의 퇴(退)를 보낸 전후좌우 툇집으로 구성하였으며 20세기 전반에 성행했던 근대형 주택이다. 특히 좌우 툇간의 폭은 매우 커서 0.7칸의 비례를 가진다. 이곳의 지붕도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부섭지붕으로 구성하였다. 부엌 1.5칸, 안방 2칸, 마루 2칸, 건넌방 1.5칸으로 구성된 상당히 넓은 안채이다. 사랑채와는 달리 안방과 건넌방 앞에는 머름을 두지 않았다. 부엌은 입식으로 개량하였고, 안방과 건넌방의 후면에는 모두 벽장을 두었다. 안마루의 후면에도 툇마루를 두었다. 건넌방 측면의 툇간은 마루로 구성하였는데, 이는 며느리를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작업 공간으로 볼 수 있다. 기단은 세벌대로 높으며, 초석은 사암(砂巖)을 다듬은 것이고, 기둥은 모두 방주(方柱)를 사용하였다. 기둥머리는 모두 납도리 구조이다. 사랑채와 다른 것은 툇마루의 보를 충량으로 구성하고 마루 중앙 칸에도 기둥을 사용한 것인데, 후면의 툇간에도 낮은 기둥을 사용하여 중앙 칸에 고주(高柱)의 구성을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상당히 오래된 기법으로, 1989년에 중수하였다 하더라도, 원래의 고식을 충실히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구는 2고주 5량(五樑)이며 홑처마이다.
이 주택의 백미는 고방채이다. 안채 남쪽에 깊숙이 자리한 고방은 북쪽으로 1개의 출입문을 두었다. 전면 7.5m, 측면 6.8m의 폭에 외벽은 나무 기둥 없이 두께 70㎝의 토석(土石) 담장으로 쌓았고, 외부는 재사로 마감하였다. 내부 중앙에 1개의 기둥이 있는데 팔각으로 다듬었고, 굵기 35㎝, 높이 383㎝이다. 상부에는 짧은 장여와 보를 걸고 사방에서 오는 추녀를 받혔는데 서까래를 매우 촘촘하게 구성하였다. 중간의 보 없이 바로 벽체에 걸리기 때문이다. 전면과 측면으로 6개의 방형(方形) 환기공을 두었다. 지붕은 우진각이지만 사모지붕처럼 보이는데, 평면이 거의 정방형(正方形)에 가깝기 때문이다. 내부의 온도는 사계절 거의 일정하여 옛날식 냉장고라 할 수 있다고 안주인이 말하였다.
의령 덕교리 강씨 고가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상류 주택으로 300여년의 주택 역사에서 적지 않은 변천을 거쳐 오면서 원래의 공간적 구성은 잘 유지해 왔다. 진입 공간의 특성은 매우 경이로우며 사랑채와 안채의 조형적 구성이 거의 유사하게 부섭지붕을 조성한 것도 특이하다. 많은 구성 형식에서 근대적 특성이 드러나 한옥의 근대화를 잘 모색하며 변천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고방은 부농(富農)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으로 옛 선인의 공학적 지혜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