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조씨(昌寧曺氏) 현감공파(縣監公派) 1세 조충가(曺忠可)는 함안에 거주하였으며, 2세 조달하(曺達夏, 14691494)가 의령군 가례면 수성리로 이거하였다. 4세 조계헌(曺季憲, 1537년생, 후릉참봉)은 둘째 아들로 남쪽 7㎞ 거리의 화정면 상정리로 이주하였다. 그의 큰아들 조사남(曺士男, 15601592, 장악원 주부)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의 좌장군(左將軍)으로 참전하여 기강전투(岐江戰鬪)에서 순국하였다. 이 집은 셋째 아들 5세 조사영(曺士英)의 후손인 10세 조유성(曺有成, 17501808)이 살림을 많이 일구어 현재의 주택을 신씨로부터 매입하였다. 14세 조균호(曺均灝, 18541899)는 1890년대에 사랑채를 신축(진양군에서 매입 후 이전)하였다. 15세 조기현(曺岐鉉, 1872~1953)은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으로 3·1운동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하였는데, 1915년에 별채를 중수(重修)하였고, 1924년에 가묘(家廟)를 건축하였으며, 1948년에 사랑채를, 1949년에는 안채를 중수하였다. 현 종손은 19세 조병구(曺炳球, 1947년생)이다.
의령읍의 남산인 벽화산(522.1m)을 북쪽 주산(主山)으로 한 화정면 상정리는 소하천을 사이에 둔 넓은 평지의 마을이다. 이 마을 가운데의 넓은 평지에 이 주택이 남향으로 위치해 있다.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가 직선축의 三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배치를 바탕으로 사랑 마당의 동측에는 마굿간이 있고, 서측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中門)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를 중심으로 중문채, 고방(庫房)채 및 사랑채가 튼ㅁ자형으로 둘러싼 안마당이 있고, ㄱ자형의 고방채 앞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안채 동쪽으로 사당(祠堂)이 방형(方形)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안채의 서쪽 후면으로는 별채와 광채가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별채 마당의 영역을 이룬다. 따라서 이 주택은 세 마당 집의 구성을 취한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전형적 구성이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으로 대문의 서측은 고방, 동측은 외측(남자용 화장실)이다.
사랑채는 대문에 거의 정면해 있는데 전면 3칸, 측면 2칸 구성의 겹집이다. 동측으로 전면 2칸의 마루를 두고, 서측으로 전면 1칸, 깊이 2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중앙 마루를 전후로 깊게 만들고 후면에 툇마루를 두었는데, 최근에 보수를 하면서 뒷벽을 막았다. ㄴ자 모양으로 구성된 마루의 후면 모서리에는 온돌방을 두었는데 그 방을 빈소방이라 부른다. 사랑채는 두벌대의 퇴적암 기단에, 다듬은 퇴적암 초석(礎石)을 받치고, 마루의 두 기둥은 원주(圓柱)로 나머지 기둥은 방주(方柱)로 하였다. 기둥머리는 전체적으로 보와 도리의 높이가 같은 납도리 구성이며,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마루 중앙에 굽은 도리를 장식적으로 추가하여 그 하부에 태극문(太極紋)을 먹으로 그렸다. 중도리는 동자주(童子柱)로 받쳤고, 종도리는 판대공(板臺工)으로 받쳤다. 전면 추녀 아래의 달 대공[懸臺工]은 소박하게 동자주를 사용하였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인데, 박공(牔栱)의 위치를 안쪽으로 쏠리게 하여 용마루의 길이가 조금 짧아 보인다. 사랑채의 상량(上樑) 묵서(墨書)에 “단기(檀紀) 4281년 무자(戊子, 1948)”라고 쓰인 중수 연도가 있다.
사랑채의 동측 후면에 서향한 중문채는 행랑(行廊)채라고도 하는데, 중문과 안채로 향한 툇간을 가진 2칸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남향한 안채가 있는데 전면 5.5칸 측면 1.5칸의 툇집으로 전후좌우 툇집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1칸 안방과 1칸 마루, 1칸 건넌방의 구성에 안방에는 부엌의 전면으로 침모방이 딸려 있고, 건넌방에는 누마루인 공루청(空樓廳)이 부속되어 있는 구성이다. 공루청은 전후 2칸의 넓은 마루로 주로 남부 지방의 상류 주택에서 안채의 다양한 생활 양식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침모방 옆으로는 다시 툇마루를 두어 음식을 준비하는 반빗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 후면의 부엌은 이 지방의 일반적인 부엌 공간보다 넓게 구성되어 있다. 안채의 기단은 두벌대로, 퇴적암을 다듬은 석재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초석은 방형으로 다듬은 것을 사용하였다. 공루 중앙의 초석은 팔각형으로 다듬었다. 기둥 머리는 거의 납도리 구조로 구성하였지만 공루의 측면에 있는 중앙 기둥은 충량(衝樑) 위에 도리를 얹는 덧도리 구조로 하였다. 가구는 3량(三樑)에 홑처마로 조성하였다. 공루 상부의 연등천장(椽燈天障)은 측면 중간 기둥에서 동자주 위로 충량을 보내고 그 위로 추녀를 걸고 서까래는 추녀에 맞댄 형식의 말굽서까래로 배열하였는데 매우 미려(美麗)한 구조가 펼쳐지도록 구성하였다. 따라서 안채는 주로 근대적 특성의 상류 주거 형식을 두루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곳간채는 남부 지방에서 보기 드문, ㄱ자형의 평면이다. 흙바닥으로 된 3칸의 곳간이 서향으로 위치하고 직각으로 안채를 향하여 2칸의 공간이 있는데, 장고방(바닥을 마루로 구성), 디딜방앗간이 있다. 전면 외벽은 판장벽(板牆壁), 후면의 외벽은 방화장(防火墻)으로 구성하고 지붕은 기와를 올린 것이 매우 고급스러운 고방이다. 외벌대 기단에 방주를 사용한 납도리 3량 구조이며, 디딜방앗간 위는 맞배지붕, 곳간 위로는 우진각 지붕으로 구성하였고, 용마루의 높이는 같도록 하였다. 그 앞에 오래된 우물이 있는데, 넓은 판석을 가구식(架構式)으로 조성한 우물 정(井) 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곳간채 앞으로는 2칸으로 된 초가집인 마굿간채가 있는데, 이 공간의 중간을 담장으로 막아 사랑채와 안채 영역으로 구분하고 사랑채 담 옆으로 출입문을 두었다. 사랑채 쪽의 1칸은 마굿간이며, 안채 쪽의 1칸은 내측(여자용 화장실)이다. 이 내측의 공간은 돼지를 키우는 공간을 겸하는 곳으로 화장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높게 설치하였다.
안채의 동쪽으로는 사당인 가묘가 있는데, 한식(韓式) 담장으로 방형의 공간을 구성하고, 전면 중앙에 일각문(一脚門)을 두었다. 사당은 전면 1칸, 측면 1칸이고, 전면 반 칸의 공간은 마루 없는 툇간으로 구성하여 준비 공간을 두었고, 출입문은 4분합문(四分閤門)으로 구성하였다. 외벌대로 된 기단 위에 툇기둥은 원주이다. 기둥머리는 주두에 소로수장(小櫨修粧)을 하였고, 보 위에 도리를 얹는 덧도리 구조로 만들었다. 가구는 3량의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별채는 초가집으로, 전면 4칸의 툇집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루의 전면에는 문을 두지 않은 영남 내륙 지방의 유형을 취하고 있다. 그 옆의 광채도 초가집이며 한 칸 온돌방 옆에 2칸의 흙 고방을 두었다.
의령 상정리 조씨 고가(宜寧 上井里 曺氏 古家)는 세 마당의 대규모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공간은 사랑 마당과 안마당 및 별당 마당으로 구성되며, 가묘의 영역도 있다. 겹집으로 이루어진 사랑채와 전후좌우 툇집으로 구성된 안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구성이며, 안채의 공루는 특히 상류 주거에서도 보기 드문 공간이다. 따라서 이 주택은 18~20세기를 거치면서 증축(增築) · 개축(改築)하여 많은 변화상을 담은, 상류 주거의 대표적 가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