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낭제는 매년 정월, 삼월~오월, 구월 중 택일하여, 마을 서낭당에서 주민들이 서낭신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이다. 동제, 서낭굿, 서낭거리라고도 한다. 산천, 수목, 암석 등의 자연숭배가 중국에서 유입된 성황 신앙과 융합하여 서낭 신앙이 되었다고 여긴다. 서낭제의 제관은 부부가 생존하여 화목하게 지내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거나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이다. 제관으로 뽑히면 수일 전부터 금기하면서 제물을 준비한다. 택일날 신목이나 돌무더기 앞에 제물을 차리고 서낭제를 치른다.
마을사람들이 매년 택일하여 서낭신이 존재하는 정화된 신성스러운 공간에서 마을 안녕과 풍농, 풍어 그리고 각 개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남성이 위주가 되어 비의적(祕儀的) 의례로 진행되는 사례가 많다. 또한 마을 어귀에는 고목(古木)이나 바위 또는 둥그렇게 쌓아올린 돌무더기로 형상화된 서낭당이 있어 사람들이 이곳을 오가며 서낭신에게 무사태평을 기원한다.
무당 신당에서도 서낭신이 모셔지는데 이때는 호랑이 그림으로 그려진 무신도로 형상화된다. 이와 같이 서낭은 동물로 상징화되기도 하지만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성별 구분이 없기도 하고 또는 남녀 구분에 의해 남서낭과 여서낭이 존재하기도 한다. 해안지역의 뱃사람들은 배 내부 한곳에 배서낭을 모셔두고 항해 안전과 풍어를 소망하기도 한다.
서낭신앙 시원에 대한 견해에는 중국 성황신앙(城隍信仰)이 들어와 형성되었다는 외부유입설과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이라는 내부전래설이 있다. 대체적으로 후자의 것에 보다 무게를 둔다. 한민족이 이 땅에 삶을 영위하면서부터 서낭신앙이 있어 왔다는 것이다. 즉 고대사회로 있어 온 이른바 천신, 산천, 수목, 암석 등의 자연숭배가 서낭신앙을 발전케 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체계는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어진 성황신앙과 융합하게 되어져 오늘날과 같은 서낭신앙으로 자리매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헌에 성황(城隍)이라는 용어가 쓰인 최초의 사례는 고려인데, 이때는 이미 중국 영향으로 인해 ‘서낭’이라는 용어가 한자어로 표기되어졌다. 『고려사(高麗史)』권90 열전3 「종실조」에, 안종 욱(郁)이 사수현 귀양에서 996년(성종 15) 죽을 때 아들에게 자신이 죽게 되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매장해 달라는 유언 속에 ‘성황(城隍)’이 쓰였고, 『고려사』권63 지17 예5 「잡사조」에서도 1055년(문종 9) 3월 임신일 선덕진(宣德鎭) 신성(新城)에 성황신사를 두고 숭위(崇威)라는 칭호를 내리고 봄가을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이로써 이 무렵에는 전래된 서낭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성황과 융합되어져 ‘성황(城隍)’이라는 용어가 지배층의 식자들에 들에 통용됐음을 알게 한다.
서낭신의 신체는 흔히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신목(神木)과 돌무더기를 쌓아 놓고 이를 서낭이라 하는 경우와, 이와는 달리 신목과 함께 신체(神體)나 신위(神位)가 있어서 신당을 따로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신체에 따라 서낭신을 모시는 제차도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전자의 경우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의례를 행한다. 길가는 사람은 이 앞을 지나면서 돌을 하나 던지고 침을 뱉는 행위와, 정월에 여인들이 횡수막이를 한다고 가족의 옷 가운데서 동정을 뜯어 제물을 차려 신목 아래서 정성을 드리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는 달리 동제 또는 부락제의 한 제차로 삼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또한, 서낭제를 치르는 횟수는 마을에 따라 다르다. 일 년에 한 번 하는 곳도 있지만, 두 번이나 또는 세 번 치르는 곳도 있다. 제의 날은 대체적으로 정월달, 삼월달, 사월달, 오월달, 구월달 중 택일하여 행한다.
도가(導駕), 제주(祭酒), 제관(祭官), 화주(貨主) 등으로 불리는 제의 집행자들은 마을 남자 원로들이다. 제관으로 뽑히기 위해서는 부부가 생존하여 화목하게 지내야 하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거나 좋은 평판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집안에 초상이 났거나 임신자, 출산자, 환자가 있으면 안 된다. 제관으로 뽑히면 수일 전부터 금기(禁忌)하면서 제물을 준비한다.
서낭당 신앙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볼 수 있으나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강원도 · 경상도 산간지방의 서낭당에는 대개 신목과 함께 신체나 신위를 모신 신당이 있다. 이러한 곳에서는 신목이 있거나 자연석이 있지만 돌무더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당이다. 이러한 서낭당은 신당이 중심이고 호남지방에서도 신당중심인 것을 알 수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신당 안에 모셔진 신위나 신체가 마을 수호신이기 때문에 동제의 중심이 되는 신이다.
이런 점에서 중부이북지방에서는 서낭당이 마을신이기 때문에 모시기는 하지만, 마을의 주신은 아니고 주신인 산신을 모시고 나서 모시는 부수신적인 성격이 있는 것 같다. 강원도 · 경상도 산간지방에서는 서낭신을 강신시키는 신간인 서낭대를 세우고 신을 강신시켜 모셔놓고 굿을 하는데, 이를 서낭굿 또는 별신굿이라 한다. 이 서낭의 주신을 ‘골매기서낭’이라 하여 남신 또는 여신으로 인격화하는 경우도 있으니, 대관령서낭에는 남녀 신당이 있고, 또 전설이 있어서 확실한 모습을 말하고 있다.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광진리 광나루마을의 서낭제를 보면, 서낭제 전 무녀가 모래밭에서 부정치기를 한다. 이때 제관 두 명이 수서낭에 제물을 차리고 재배(再拜)한 뒤, 수서낭을 모시고 바닷가에 위치한 암서낭으로 모셔 가서 합배(合配)한다. 제수를 진설하고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등이 헌작(獻爵)하고 재배한다. 이어서 무녀가 부정굿과 서낭굿을 하고 도가 소지(所志)를 올린다.
소지가 끝나면 용왕굿을 한다. 또한 잡귀잡신을 위해 제수(祭需)를 일부 떼어 바다에 던진다. 그리고 암서낭에서 수배신을 위한 굿을 한 후 참석자들이 음복(飮福)한다. 제의 뒤에는 금줄을 걷고, 도가나 제주는 사흘 동안 부정을 피하고 몸가짐을 조심한다. 그 후에도 부정한 곳의 출입 금지 및 금기 생활을 보름 또는 반년동안 지킨다.
서울 이태원 부군당의 서낭당에서는 매년 부군당굿이 열릴 때마다 서낭제가 행해지는데 이를 서낭굿 또는 서낭거리라고 한다. 부군당 당집 전각 정문 앞의 담장을 따라 약 20m 정도 언덕 밑쪽으로 내려가면 서낭당이 있다. 이곳 서낭당은 지형이 움푹 파져 이태원 부군당 터 일대에서 가장 지면이 낮은 곳이다.
서낭당에는 주로 엄나무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잡풀들이 무성하게 감싸고 있다. 또한 서낭목으로 지정된 엄나무 한 그루가 있고, 나무에 오색 천과 새끼줄로 치장해 두었다. 무녀가 이곳에서 간단한 제물을 올리고 춤을 추어 강신을 한 후 서낭공수를 내린다. 서낭굿이 끝나면 새롭게 장만한 북어를 서낭목에 매단다.
서낭신앙에서는 서낭목이라 불리는 고목의 신목(神木) 또는 돌무더기나 자연암석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들은 서낭신이 인간세계와 접할 때 매개체 역할을 하는 신체(神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와 같은 상징물을 통해 하늘과 연결 통로를 만들어 신과 교감대를 형성하여 소망하는 바를 이루려 한다. 이러한 형식의 서낭제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있어 온 대규모적 제천의례(祭天儀禮)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써 신인합일사상(神人合一思想)의 근거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