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준(徐元俊)은 1908년으로, 평안남도 중화 출신이다. 호는 황파(荒波), 가명은 김정일(金正一)이다. 서정벽(徐正璧)의 아들이다. 부친과 함께 3년간 포목행상(布木行商)을 하였고, 1920년 평양으로 이사한 뒤 야학(夜學)에서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서 1924년까지 평양 김승기(金承基)의 지물점과 윤세식(尹世植)의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거나 양말 직공으로 일하였다. 같은 해 평양점원상조회(平壤店員相助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6년 12월 5일에는 평양노동청년회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평양양복직공 동맹파업에 관한 조사위원을 선정하는 등 책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평양노동청년회와 평양양복직공청년회의 집행위원 연합총회를 개최하던 중 평양경찰서 고등계 경찰관에게 박철(朴哲) · 김종성(金鍾聲)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평양지부 청년회인 ‘평양노동청년회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1928년 9월 21일 만기 출옥하였다.
1929년 6월 평양노동연맹 정기 대회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재선되었고, 1930년 4월 평양노동연맹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검사위원에 선임되었다. 1930년 옥중에서 교유한 김현우(金玄宇) · 김묵해(金默海) · 김영산(金英山) 등과 만주로 건너가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하여 무장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청년부원으로 있으면서 주로 농촌 지역을 순회하며 항일 사상을 고취하였다.
1931년 7월 조선혁명군 국내모연특파원(國內募捐特派員)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평안북도 벽동(碧潼) 일대에서 활동하며 압록강 유역의 일본 경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1933년 1월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1,600여 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조선혁명군으로 송금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조선혁명당 군사위원으로 부하 김병한(金炳漢) · 장일화(張一華) 등과 국내에 잠입하였고, 경의선 거련관(車輦館) 역전에 있는 일본인 상점을 기습하여 6,000원을 빼앗아 본부로 보냈다. 6월 3일 안영준(安永俊)과 함께 조선은행 평양지점과 금융조합을 기습하기 직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총격전으로 맞서며 탈출하여 사리원으로 가는 도중 일본 경찰과 대치하여 일본 순사부장 도미다〔富田吉五郎〕를 사살하고, 사리원을 지나 중화군 당정면에서도 일본 경찰과 총격전이 있었으나 모두 격퇴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에 의해 ‘평양총격사건’으로 불리면서 『 조선일보』와 『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에서 대서특필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서는 1933년 6월 17일 호외를 발행하여 그 활동을 단독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 시건을 중대한 사건으로 인식한 일제는 평양경찰서는 물론 평안남도 경찰부에서까지 출동하여 체포하려 하였지만, 14일 동안 수차례에 걸친 체포 시도는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1933년 6월 16일 평원군 어느 마을에 들어가 품팔이꾼으로 가장하고 쉬는 사이 밀고자에 의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해 7월 8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총포화약취체 규칙 위반, 동령 시행규칙 위반, 강도급 강도 예비, 살인급 살인 미수’ 등의 죄명으로 10월 9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상고하였으나, 1935년 4월 30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