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해방 이후 조선일보 부사장, 한국일보 부사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중동학교에서 교장이던 최규동(崔奎東)의 도움으로 일본유학 교비생으로 뽑혀, 1933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최규동으로부터 언론계 진출을 권유받아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가 그 해 12월부터 언론계생활이 시작되었다.
입사하여 4년 동안 사회부기자로 활동하였으며, 1938년 8월에 편집부기자, 같은 해 12월에는 논설위원으로 사설을 집필하기도 하였으며, 1940년 8월에는 편집부 차석이 되었다.
이 때 『조선일보』가 폐간을 당하여 약 3개월 쉬다가, 1940년 11월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입사, 지방부장을 거치며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조선일보』 복간사업에 참여하여 1945년 9월 재입사, 편집책임을 맡았으나 3개월 만인 1946년 2월 사상 관련의 모함을 받아 회사를 떠났다.
같은 해 3월 성재경(成在慶)이 운영하던 대성출판사(大成出版社)의 고문으로 들어가 밀(Mill,J.S.)의 『자유론』, 손문(孫文)의 『삼민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 등 정치사상 서적 5권을 번역, 간행하였다.
1950년 2월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方應謨)로부터 세 번째 부름을 받아 편집국장으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6·25전쟁이 발발, 인민군의 조선일보사 검색으로 직원 80여 명이 북괴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풀려난 일이 있으며, 같은 해 8월 5일 적치하의 서울을 탈출하여 향리인 아산에 피신하였다. 1951년 1월 조병옥(趙炳玉)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지에서 『조선일보』를 발간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수원에서 전시판(戰時版)을 발간하였으며, 1958년 11월 천관우(千寬宇)에게 편집국장을 물려주기까지 10년 가까이 『조선일보』로서는 최장수 편집국장을 지냈다. 그 뒤 부사장으로 만 2년 동안 재임하였다. 4·19혁명이 나던 1960년 7월 국회의원총선에 향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하였다.
이듬해인 1961년 한국일보사 부사장으로 취임, 주필을 겸임하였고, 1963년 민주공화당의 창당발기인이 되었다. 그 해 11월 서울 영등포에서 공화당 공천을 받고 출마했다가 낙선하였다. 같은 해 5월 당무위원, 12월 정책위원을 거쳐 1964년 12월 홍보분과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언론인물지』(한국언론연구원, 1981)
- 『조선일보60년사』(조선일보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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