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이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중 이곳에 절을 창건하여 머물다가 갔다고도 전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주변에 산재한 덕주사(德周寺) · 덕주골 등 마의태자 일행과 관련된 명칭으로 보아, 이 절의 창건이 마의태자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과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은 마의태자가 일행과 함께 건립한 것이라 전한다. 현재 사지(寺址)에 산재되어 있는 석불 · 석탑 · 석등 · 귀부(龜趺) 등의 문화유산으로 보아 당시에는 규모가 매우 큰 가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192년(명종 22) 원명(元明) 등이 금당(金堂)을 중수하였고, 1254년(고종 41) 몽고병란으로 소실된 뒤 고려 말 조선 초에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18세기경에 중건하였으나, 1936년의 폭우로 산사태를 만나 사찰이 매몰됨에 따라 폐사가 되었다가, 6·25 이후에 조그만 요사만을 지어 세계사라고 불렀다.
최근까지 이 절의 원래 이름이 알려지지 않다가 1977년 청주대학교의 발굴조사팀에 의하여 미륵당초(彌勒堂草)라고 새긴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미륵사지임이 확인되었고, 현재 중원문화권의 개발에 힘입어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이곳에는 보물을 제외하고도 197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충주 미륵대원리 석등과 197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충주 미륵대원지 삼층석탑, 사각연화석등 · 귀부 · 당간지주 · 공깃돌 등이 있다.
석등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높이 2.3m의 화강암재이며, 귀부는 길이 6.4m, 넓이 1.5m, 높이 0.8m의 거대한 돌거북으로 등 중앙 부분에 비를 세웠던 홈이 패어 있고, 얼굴을 높이 쳐든 모습이 생동감이 넘치는 동양최대의 귀부이다. 바위 위에 올려진 지름 1.5m의 공깃돌은 온달장군이 국경 경비 중 휴식을 취하면서 부하들과 더불어 놀이를 할 때 사용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밖에도 발굴조사 때에 범자(梵字)가 새겨진 기왓장을 비롯한 많은 고려 초기의 수막새 · 암막새 · 명문와 · 치미(鴟尾), 구마도(驅馬圖)와 맹호도(猛虎圖)가 그려진 기와, 사자석상 · 용머릿돌 · 금동귀면 · 청동신장 · 금동소탑옥개 등이 발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