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고남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20대 신종의 능.
건립경위
이후 25개월간 신종의 신주는 혼전에 모셔두었다가, 1206년(희종 2) 2월 기미일에 태묘에 부묘하였다. 같은 해 9월 갑오일에 희종이 양릉을 알현하고, 능 옆의 창신사(彰信寺)를 다시 지어 그 편액을 효신(孝信)으로 바꾸었다.
변천
조선 현종 3년(1662)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의하면 양릉의 위치는 개성부 남쪽 용수산 무통현 서남쪽에 있다고 조사되었다. 당시 양릉은 능의 형태는 있으나 5〜6척에 불과하였고, 사면 석물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계체석은 다 파내어 능토가 훼손되었는데, 파괴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좌우의 장군석은 파내고 옮겨 세운 흔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도굴을 당하였다. 원래 능의 소재지는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양릉리였지만, 현재는 개성특별시 개풍군 고남리로 지명이 바뀌었다.
형태와 특징
1963년 당시에는 난간 석주들이 봉분 속에 군데군데 끼여 있었으나, 1995년 수리를 하면서 봉토 주위를 두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찾기 어렵다. 현재 도로 사이에는 깨진 난간 기둥석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고, 왕릉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하다.
봉분의 북쪽 모퉁이에는 곡장을 쌓았던 돌무더기 흔적이 남아 있다. 1916년 조사 당시 직경 7.27m이었고, 1978년 북한에서 조사하였을 때는 높이 290㎝, 지름은 900㎝였고, 2008년 실측 봉분의 높이는 285㎝이며, 지름은 660㎝이다. 제1층단에는 동서 양쪽에 문석인 1쌍이 남아 있다.
두 문석인이 마주 선 거리는 930㎝이다. 문석인들은 한 돌을 깎아 만들었고, 둘 다 대석 위에 조복을 입고 두 손을 모아 쥔 모습이며, 조각 솜씨는 거칠고 조잡하다. 서쪽 문석인은 높이 158㎝, 어깨 너비는 46㎝, 두께는 38.1㎝이다. 대석 부분은 땅에 거의 묻혀 있고, 땅에 묻힌 부분의 높이는 22㎝이다. 동쪽 문석인은 158.2㎝, 어깨 너비는 46.2㎝, 두께는 38㎝이다.
1963년에 조사할 당시 조선 고종 4년(1867)에 세운 표석이 앞으로 넘어져 있었고, 나머지 석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제3층단 앞에 있던 정자각 터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내부 구조와 발굴 유물
천장은 평천장으로 직경 약 123㎝의 천구원을 그리고, 원 안에 북극삼성과 북두칠성을 비롯한 성좌를 표시하였다. 원의 외곽으로는 28숙을 비롯한 별무리와 달을 그렸다. 천체도의 북쪽 부분이 떨어져 북방칠수는 마멸되었다. 남아 있는 별의 수는 158개이다. 별은 붉은 색으로 0.5~0.9㎝ 크기로 그렸고, 별과 별 사이에는 붉은 선으로 연결시켰다.
널방 남벽에는 두 개의 큰 판돌을 세워 문틀을 이루게 하였다. 이 두 개의 판돌 높이는 226㎝, 높이는 255㎝, 두께는 27㎝였다. 벽체는 석실에 바닥을 고르게 한 다음 그 위에 쌓았고, 남벽에는 큰 판돌을 세워 문틀을 이루고 있다. 문의 높이는 216㎝, 문에는 돌을 잘 다듬어 문턱을 만들어 놓았고, 동벽과 서벽의 남쪽 끝에는 아래 위에 가름대를 건너 대었던 구멍과 나무문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
무덤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관대는 바닥 중심에 여러 개의 돌을 맞추어 만들어 놓았다. 관대는 길이 267㎝, 너비 140㎝로 40 x 31㎝ 크기의 돌로 포장하듯 깔았다. 관대는 고임 없이 무덤칸 바닥에 깔았기 때문에 높지 않으며 바닥에 깐 전의 높이와 같다. 천장의 크기가 비슷한 3개의 널돌을 남쪽부터 가지런히 덮었다. 널방의 벽과 천장은 회죽으로 미장하고 여기에 벽화를 그렸다. 동벽과 남벽은 벽화 흔적이, 서벽과 북벽에는 사람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현실의 바닥은 방전을 깔았으며, 관대는 바닥 위에 네모진 여러 개의 돌로 만들어 놓았다. 관대의 크기는 2.72 x 1.5m이고 다양한 유물이 수습되었다. 고려자기를 비롯하여 길이 28㎝에 너비 22㎝의 도금한 청동제 자물쇠, 백동거울, 직경 약 2㎝ 정도 되는 금동방울 1개, 걸개못, 몇 종류의 쇠못과 돈이 나왔다.
그중 주목할 것은 능주를 알 수 있는 신종의 대리석 시책(諡冊)이 출토된 점이다. 그동안은 도굴되어 장물로 수습된 인종의 장릉에서 출토된 시책과 비교된다. 다양한 고려자기가 수습되었는데, 지름 13.5㎝ 되는 상감청자국화문 분합뚜껑 1개, 모란문완, 화형접시, 백자접시 등 고려자기의 편년에 기준이 될 만한 유물들이 보고되었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
단행본
- 장경희, 『고려왕릉(증보판)』(예맥, 2013)
- 김인철, 『고려왕릉연구』(사회과학출판사, 2010)
-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 한국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대백과』(평화문제연구소, 2005)
- 김인철, 『고려무덤 발굴보고』(백산자료원, 2003)
-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墳調査報告)』(조선총독부, 1916)
논문
- 박형열, 「고려왕릉의 특징과 변천」(『고고학』 제20권 제1호, 2021)
-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 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한국중세고고학』 5, 2019)
- 장경희, 「12세기 고려, 북송, 금 황제릉의 비교연구」(『동방학』 30, 2014)
- 윤기엽, 「고려 혼전의 설치와 기능」(『한국사상사학』 45, 2013)
- 김일권, 「고구려의 천문 문화와 그 역사적 계승: 고려시대의 능묘천문도와 벽화무덤을 중심으로」(『고구려연구』 22, 2006)
인터넷 자료
- 이북오도청(https://ibuk5do.go.kr/)
주석
-
주1
: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 삼 년 동안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 우리말샘
-
주2
: 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우리말샘
-
주3
: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주, 석등, 상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
주4
: 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 우리말샘
-
주5
: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
주6
: 돌을 다듬어서 만든 기둥. 우리말샘
-
주7
: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
주8
: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
주9
: 바닥을 받치고 있는 돌. 우리말샘
-
주10
: 고분 안의 돌로 된 방. 우리말샘
-
주11
: 예전에, 무덤 안에 관을 얹어 놓던 평상이나 낮은 대. 횡혈식 석실 따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말샘
-
주12
: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무덤 속의 방. 우리말샘
-
주13
: 네모반듯한 벽돌. 우리말샘
-
주14
: 시책문을 새긴 옥책(玉冊)이나 죽책(竹冊). 우리말샘
-
주15
: 절도, 강도, 사기, 횡령 따위의 재산 범죄에 의하여 불법으로 가진 타인 소유의 재물. 우리말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