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향교 ()

양주향교 전경
양주향교 전경
유적
국가유산
조선 전기, 지방교육 및 교화를 위하여 경기 양주목에 세워진 향교.
유적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부흥로1423번길 50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양주향교(楊州鄕校)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향교
지정기관
경기도
종목
경기도 문화유산자료(1983년 09월 19일 지정)
소재지
경기 양주시 부흥로1423번길 50 (유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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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양주향교는 조선 전기 지방교육 및 교화를 위하여 경기 양주목에 세워진 향교이다. 19세기에 대규모로 중건되었으며, 전학후묘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59년에 중건했다. 현재는 경기도 양주시 소재로 되었으며, 1983년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정의
조선 전기, 지방교육 및 교화를 위하여 경기 양주목에 세워진 향교.
건립 경위

창건 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현의 동쪽 2리에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15세기 어느 시점에 건립되었다고 판단된다. 양주향교 건립은 조선 건국 후 1읍 1교 원칙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의 향교 건립은 지방 인재 양성 및 교화를 위해 시행된 것이었다.

변천

양주향교의 조선 전기 변천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에 재건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확인되는 기록은 1850년의 중건이다. 홍직필(洪直弼)의 「양주목학중수기(楊州牧學重修記)」에 따르면, 김신근(金愼根)이 양주목사로 부임한 후 여름부터 공사를 시작해 겨울에 끝마쳤는데, 대성전과 동무 · 서무를 새롭게 짓고, 재실(齋室)의 옛터에도 건물을 세우고 단청을 칠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58년에 복원했다.

형태와 특징

양주향교는 앞쪽에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는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를 띠고 있다.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 명륜당 · 동무(東廡) · 서무(西廡) · 내삼문(內三門) · 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한식 주1를 얹은 맞배지붕이고, 명륜당은 석축 위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동재와 서재가 없다.

의의 및 평가

조선은 건국 후 향교에 전답과 노비 등을 지급하고 교관을 파견해 교생들을 가르쳤고, 봄과 가을에는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도록 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유학 이념으로서 백성들을 교화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했고, 그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오늘날 양주향교에서는 인성예절 다도 체험교육 및 기로연 등의 행사를 통해 지역 문화 결집의 구심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양주향교는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매산집(梅山集)』 권11, 「양주목학중수기(楊州牧學重修記)」

단행본

『교궁대관(校宮大觀)』(성균관, 2001)

논문

조상순, 「조선 중기 이전 향교건축의 형성과 전개: 관련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성균관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3)
주석
주1

암키와의 이음짬에 수키와를 덮어서 골이 지게 만든 기와.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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