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전씨(田氏), 법호(法號)는 수월(水月). 충청남도 홍성 출신. 젊은 시절에는 머슴살이를 하였으며, 1884년(고종 21)에 서산시천장사(天藏寺)에 출가하여 성원(性圓)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배움이 없고 근기(根機:깨달을 수 있는 능력)가 둔하여 불경을 배워도 쉽게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33세까지 땔나무를 해오는 부목(負木)의 소임을 맡고 있었다.
하루는 불공에 사용할 공양을 지어 법당으로 갔는데, 마침 염불승(念佛僧)이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를 송(頌)하고 있었다. 이를 한번 듣고 모두 외운 뒤 천수주를 염송하는 데 몰두하였다.
어느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천수주를 외우다가 밥이 타는 것도 잊고 몰두하였는데, 이를 본 스승이 따로 방을 하나 주어 정진하게 하였다.
그 날부터 7일 동안 밤낮없이 천수주만 외우다가 7일째 되는 날 “잠을 쫓았다.”고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왔는데, 그 때 천수삼매(千手三昧)를 증득하고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얻게 되었다.
글을 몰라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였고 신도들의 축원을 쓰지도 못하였지만, 어떤 경전을 놓고 뜻을 물어도 막힘이 없게 되었고, 축원자의 이름을 귀로 한번 들으면 축원 때에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고 한다.
그 뒤 참선에 몰두하여 성원의 법을 이어받았다. 도가 높아감에 따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총독까지 그를 만나고자 하였으므로 번거로움을 피하여 자리를 옮겨가며 정진하였다.
오대산의 상원사(上院寺)에서 한암(漢巖)과 함께 정진하다가, 서울을 거쳐 평안북도 영변 묘향산 중비로암(中毘盧庵)에서 3년 동안 머물렀다. 다시 평안북도 강계천녕산(天寧山)자조사(子兆寺)를 거쳐, 백두산 밑의 한 농가에서 3년 동안 소를 먹여 주었다.
이 때 백두산을 넘나드는 길손들에게 짚신과 점심을 제공하는 등 많은 보살행을 쌓았다고 한다. 그 뒤 간도지방의 동녕현에서 6년 동안 머물렀는데 이곳에까지 사람들이 찾아왔으므로 다시 강청현(江淸縣)으로 가서 화엄사(華嚴寺)를 짓고 8년 동안 머무르다가 7월 16일에 입적하였다.
입적을 한 날부터 7일 동안 방광이 있었고 다비(茶毘)한 뒤에도 많은 사리들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 한 글자의 문자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의 사상을 살필 자료가 없다.
또한, 평생을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려하여 숨어 살았으므로 전기도 뚜렷이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그를 오도한 뒤에도 조금도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천수삼매를 얻은 뒤 평생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한 최근세의 숨은 도인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