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

식생활
개념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을 모두 가리키는 식생활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을 모두 가리키는 식생활용어.
개관

우리나라는 동아시아 동부에 돌출한 반도로서 뚜렷한 사계절의 구분과 기후의 지역적 차이가 있어 각 지방마다 식품자원이 다양하게 생산된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살린 음식들이 고루 잘 발달되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볼 때 궁중음식을 근간으로 하는 궁중 반가음식과 일반 백성들의 서민음식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 따른 향토음식도 특색있게 발달하였다. 또 이러한 음식이 발달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는데는 반드시 나름대로의 과학성과 필연성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5첩반상의 경우를 보더라도 밥·국·김치·장·조치와 함께 나물·구이·저냐·자반·장아찌 등 5가지 찬물로 되어 있어,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를 고르게 섭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맛 또한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조리를 함에 있어서는 좋은 식품재료, 부엌세간, 화력, 양념의 네 요소가 잘 조화될 때에 비로소 좋은 음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음식에 있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정성과 사랑 그리고 봉사의 마음으로 즐겁게 만든 음식은 가족은 물론 사회를 건강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다른 나라 음식에 비해 정성과 노력 그리고 시간이 많이 드는 우리 음식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조리과정을 통해 자기 수련도 되고 바른 태도와 바른 맛을 만들어내는 요령이 스스로 터득되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 음식문화가 정립되고 존속되어와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시대적 변천

선사시대의 음식문화

선사시대라 하더라도 구석기시대에 대하여는 식생활사에서 다룰만한 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고고학의 도움으로 후기 구석기시대에 타제석기로 자연물을 채취하여 음식을 만들었으리라는 사실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이다. 구석기시대에 이어 석기를 곱게 갈아서 만든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흙을 빚어 구운 토기(土器)의 사용을 특징으로 하는 신석기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시대의 초기 식생활은 수렵과 어업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특히 어업에 의존하였던 듯 우리나라의 남해안이나 서해안 중부, 함경도의 북부 해안지방들에서는 많은 조개무지가 발견되고 있다.

한편 신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면 우리 음식문화 형성의 발단기라고 할 수 있는 곡물생산이 시작되고 있다. 황해도 지탑리유적(智塔里遺蹟)에서 돌가래·돌낫 등과 함께 탄화된 기장(피라고 보는 견해도 있음)으로 보이는 곡립(穀粒)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라든지, 평안남도 궁산리유적(弓山里遺蹟)에서 원시적인 농경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순록(馴鹿)의 뿔로 된 괭이와 동물의 치아로 된 낫 등이 발견되고 있음은 그 증거이다.

선사인들의 유적지인 조개무지에서 총 31종의 조개류가 발견되고 있고, 도미·삼치·상어 등의 물고기뼈와 고래·바다표범·물개 등과 같은 바다짐승의 뼈가 발견되고 있어, 이들이 모두 식품으로 이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육지의 야생동물도 식품으로 이용되었으니, 부산 동삼동(東三洞)이나 함경북도 농포동(農圃洞) 조개무지에서는 사슴·멧돼지·노루·고라니·야생개·산토끼 등의 뼈가 발견되고 있다. 이밖에 도토리·밤·마[薯]·칡뿌리 등과 같은 야생식물의 열매와 뿌리도 발견되고 있어 이들도 식품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농경이라는 새로운 생산적 생활양식이 도입되면서는 곡물이 식품으로 쓰였다. 곡물의 종류로는 황해도 지탑리, 평양 남경리(南京里) 유적 등에서 탄화된 피·기장·조 등의 곡립이 발견되고 있어 대략 그 종류를 알려주고 있다.

조리

먼저 날 것을 먹는 방식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날 것을 먹는 방식은 그 유적의 도구들로 미루어 통채로 먹기보다는 썰거나 절단해서 또는 가루로 부수어서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조리법은 불을 이용했으리라는 것이다. 구석시시대의 주거지(상원읍이나 포전리 점말동굴)에서 난방장치가 발견되고 있어 구석기시대에 이미 불을 식생활에 이용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나, 그 방식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신석시시대의 집터에서 어김없이 화덕이 발견되고 있고, 화덕 주변에는 곡물과 함께 취사도구가 있어 굽거나 찌는 조리법을 가능케 하고 있다. 또한 곡물을 가는 갈돌이 발견되고 있어 곡물을 갈아 불에 익히는 조리법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데, 곡물을 갈아 약간의 수분을 첨가하여 불에 익혔다면 이는 죽요리를 의미한다. 결국 죽은 우리나라 곡물 음식의 최초가 되는 셈이다.

저장

선사인의 식품저장은 계획적인 것은 못되었으나 그 나름대로 생활의 지혜를 발휘한 방법을 고안해 내고 있었다고 보아진다. 먼저 띄워 저장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야생열매를 그릇에 오래 담아두면 자연히 발효가 되기 마련이므로 이는 인류가 배운 가장 최초의 저장법인 셈이다. 이것이 후에 술을 담가 마시는 양조의 방법으로 발전하였다.

저장법으로는 또 말리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어패류나 나무열매, 짐승의 고기를 말렸다가 추운 겨울이나 불의의 사고에 대비했을 것이다. 이밖에 신석시시대의 움집속에는 저장혈(貯藏穴)이 있어 나무열매나 곡물을 땅속에 묻어 저장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겨울철에는 어패류를 어름에 묻어 저장하는 냉동 저장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음식문화

선사시대를 거쳐 서기전 2,400년경에 고조선이라 총칭되는 국가단체가 이룩되었다. 이로부터 기자조선·위만조선을 거쳐 서기전 107년경에는 고구려·예맥·부여·옥저·낙랑 등을 국명으로 하는 독립 정치세력이 등장하게 되었고, 한강 이남지역에서는 마한·진한·변한 등으로 불리우는 삼한(三韓)이 성립되어 꽤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식생활은 철제농구가 어느정도 보급된 상태여서 벼농사를 비롯한 농경이 성했으므로 식생활의 다원화, 조리법의 발달, 국가간의 식품교류등 식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한편 이 시대에는 소형용기(小形容器)가 나타나고 있어 공동식기시대에서 개인식기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데다가, 각종 곡류가 주식의 자리에 대치될 수 있었으므로 주부식분리(主副食分離)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식재료

2.1.1. 곡류

이 시대의 각종 제천의식(祭天儀式)들이 말해주듯이 농경은 원삼국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당위였다. 이때 생산되었던 곡물의 종류는 이 시대의 유적지에서 나온 탄화미라든가 무문토기에 나타나 있는 곡물자국 등을 종합해 볼 때 대략 피·기장·수수·조·보리·벼·콩·팥 등으로 정리된다.

2.1.2. 과채류

농경이 어느정도 발달된 상태였고 또 일찍부터 야생식물을 식용해 왔던 만큼 과채류도 재배되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채류는 쉽게 부패해 그 흔적이 남아있을 리 없고 기록 또한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다만 ≪삼국유사≫<고조선조>에 쑥과 마늘이 나오고 있고, 또 같은 책 <박혁거세조>에 박 정도가 나오고 있을 뿐이다.

2.1.3. 수산물류

내륙지방에서는 농경이 크게 발전하고 있었던 시대였지만 해안지방에서는 여전히 어로가 성행하고 있었다. 그 종류를 보면 조개류로는 해진안댐조개·새꼬막·긴고둥·전복·홍합·국자가리비·피뿔고둥·두드럭고둥·살고둥·다슬기·우렁이 등이 있었고, 생선으로는 도미·삼치·상어·조기·모래무지·농어·복어·가자미 등이 있었다.

2.1.4. 육류

전적으로 사냥에 의해 얻어지던 육류가 원삼국시대에 이르러 사육에 의해 얻어졌다. 사육은 특히 북부지방에서 발달한듯 ≪삼국지≫<위지동이전 魏志東夷傳>에는 “부여인들이 짐승을 기르는데 능숙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육된 동물은 말·소·돼지·개·닭 등이었다.

조리법

2.2.1. 곡물의 조리

이 시대의 유물에서 시루가 발견되고 있고 시루의 밑바닥에는 검은 응집물이 있어 불을 때서 솥으로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이때의 곡물 조리법은 곡물을 가루내어 죽을 쑤는 외에 시루에 찌는 방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곡물을 가루내어 시루에 쪘다면 그것은 떡을 의미한다. 만들어진 떡은 당시 국가들이 가졌던 각종 제천의식에 쓰였고, 이러한 전통이 훗날 떡이 제향음식의 주요 품목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2.2.2. 육류의 조리

최남선(崔南善)의 ≪고사통 古事通≫에 따르면 이때에 한대(漢代)로부터 갱저(檟鵄)와 맥적(貊炙)이라는 숙육법(熟肉法)이 들어와 연향(宴饗)의 내용을 성대하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어 저(煮)란 고기찜, 적(炙)이란 고기구이를 말하는 것이며, 갱(檟)은 서북의 유목민족, 맥(貊)은 동북의 부여계 민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맥적은 부여식 고기구이를 말하고 맥적을 중심으로 한 식탁을 맥반(貊盤)이라 칭한다 하였다. 위의 기록으로 미루어 이 시대에 고기찜과 구이의 조리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장법

이때의 식품 저장은 조리의 방법인 띄우는 방식, 곧 발효법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술과 장이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이 시대에 보이는 호형토기(壺型土器)는 술이나 장의 가공 저장용으로 쓰였던 그릇이다. 조리법에 의한 저방법으로는 또 굽는 방식이 있었다. 고분이나 유적에서 발견되는 탄화미(炭化米)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시대로 오면서 조리법과 저장법이 상보관계에 있게 되며 이러한 형태는 오랜 기간 지속되게 된다.

삼국·통일신라시대의 음식문화

왕국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못했던 원삼국시대를 거쳐 4세기경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하는 삼국시대가 이어졌다. 그리고 7세기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이 시대에는 벼농사의 정착이 어느 정도 음식문화에 안정을 가져다 주었고, 국가의 형성과 함께 계층화 된 신분제도가 식생활 자체를 귀족식과 서민식으로 분리시키는 계층화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또한 농경 중심의 제천의식과 이에서 비롯한 명절 등의 행사가 식생활의 폭을 다양화 시켰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삼국의 음식문화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식생활의 계층적 형태를 완성해 갔다. 이때는 또 농경의 발달과 쌀의 생산 및 외국과의 교류가 성행됨에 따라 한국음식의 체제가 정착된 시대였다. 이렇게 정착된 음식문화는 일본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식재료

3.1.1. 곡물

삼국 이전부터 있어왔던 쌀·피·기장·수수·조·보리·콩·팥 외에 부여의 백제 군창지에서 밀과 녹두가 출토되고 있어 이러한 곡물도 식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 곡류에서 쌀은 주로 귀족들의 주식이었고, 서민들의 주식곡은 대개 보리와 콩이었다.

3.1.2. 과채류

앞시대에 있었던 도토리·밤·잣·마 외에 무·상추·복숭아·오얏(자두)·배·밀감 등이 기록에 전한다. 이중 상추는 수(隨)나라 사람들이 그 종자를 입수하기 위해 비싸게 사갔으므로 천금채(千金菜)라 불렸다. 잣 또한 그 질이 좋아 신라의 사신들이 중국에 갈 때 가지고 가서 비싼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리고 밀감은 이때부터 이미 제주의 특산물이었으니, 일본에서는 이 밀감을 구하고자 사람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약용식품으로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는 삼이 식용된 것도 이때이다.

통일신라로 오면 미나리·오이·앵두·참외 등의 과채류도 등장하게 된다.

3.1.3. 수산물류

항해술의 발달, 지중양식(池中養殖) 등으로 비교적 풍부한 수산물이 식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이 시대의 구체적인 수산물의 종류는 ≪해동역사 海東繹史≫<물산지 物産志>에 웅어·새우·조기·상어·돌고래·가자미·숭어·문어·농어·낙어·반어·다시마 등이 보인다.

3.1.4. 육류

앞시대에 비해 목축이 한층 조직적으로 발달하였다. 신라에서는 목숙전(㉰典)이란 관아를 두어 목축에 쓰이는 사료를 담당하고 있었고, 양을 사육하는 양전(羊典), 고기를 다루는 육전(肉典)도 있었다. 또한 도서지방에 방목장(放牧場)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어 신라의 목축이 매우 기업화되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구려에서도 안악3호분(安岳三號墳) 벽화에 외양간과 마구간이 그려져 있어 소·말 등의 가축이 사육되었음을 말해주고 있고, 백제에서도 소·돼지·닭 등이 사육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3.1.5. 조미료

암염(岩鹽)이나 해안의 암초·해초 등에서 소금기를 채취하던 단계를 거처 이 시대로 오면 차부(鹺府)라는 관청을 두어 소금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맡고 있다. 이는 소금이 필수적인 조미료의 하나로 식생활에 정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원삼국시대에 벌써 만들어졌던 장(醬)이 본격화되었고 꿀·기름·천초·생강 등도 사용되었다. 이밖에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들어와 일부 상류층에서 조미료로 쓰던 귤피(橘皮)도 있었다.

조리법

3.2.1. 떡의 발달

앞시대에 등장한 떡은 쌀을 중심으로 한 농업이 크게 확대되면서 한층 발달하였다.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어김없이 발견되고 있는 시루를 비롯하여, 고구려 벽화의 시루모습,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서 산견되는 떡에 관한 기록 등은 이러한 사실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이 시대의 떡은 제향음식으로 쓰이는 외에 명절과 같은 특별한 날에 만들어졌다.

3.2.2. 김치의 활용

이 시대로 오면 김치가 중요한 부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고추가 쓰이기 이전이므로 장이나 젓갈에 저려 만든 짠지의 일종이었다, 삼국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일본 나라시대(奈良時代)의 ‘나라쯔께’라는 것도 이 때의 짠지가 전해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천초·생강·귤피 등 향신미(香辛味) 나는 조미료를 이용하여 국물김치가 개발되기도 하였다.

3.2.3. 포(脯)의 등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조>에 신문왕의 결혼예물로 포가 들어있다. 이는 육류를 얇게 저며서 말린 오늘날과 비슷한 육포가 이 시대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육류를 말려 저장하는 방식은 삼국 이전부터 있어 왔으나 이때는 대개 고기를 통채로 말려 저장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포는 한단계 발전한 육류가공법인 셈이다.

3.2.4. 기호식의 다양화

원삼국시대에 있어왔던 술 외에 차(茶)가 새로운 기호음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가 전래된 것은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이다. 그러나 이때의 차는 당(唐)으로부터 들여온 것이다. 차가 이땅에서 직접 재배된 것은 그후로도 2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이르러서였다.

통일신라시대로 오면 차에 곁들여 먹는 기호품으로 강정과 유밀과가 만들어졌다. 강정은 당의 면견(麵繭)이 전래된 것으로 이때에는 견병(繭餠)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유밀과는 그 본고장이 인도로 추정되는데, 불교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3.2.5. 국의 등장

통일신라시대의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의 글에 "헛되게 밥만 먹으니 국에 맛을 조화하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라는 구절이 보이고 있는데, 우리 문헌에서 국[羹]에 관한 기록은 이것이 처음인듯 하다. 고려시대에 크게 발달하여 그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우리 음식의 대표적인 부식으로 뿌리를 내린 국은 바로 이 시대에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장법

장류(醬類)가 한층 발달하여 이를 이용한 저장식품이 고안되었고, 젓갈을 이용하여 저장하는 방법도 고안되었다. 이때의 저장법에서 또하나 중요한 것은 장빙(藏氷)의 시작이다. 각종 기록과 유적으로 남아있는 석빙고 등을 볼 때 결빙기에 천연빙을 채취하여 저장했다가 여름철에 식품을 저장하는데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음식문화

고려왕조는 관료제도의 발달과 불교적 분위기의 심화를 그 특징으로 했던 시대이다. 식생활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주로 채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다가 몽고로부터 설렁탕이 들어오면서 차차 육식으로 변화되어 갔다. 또한 원으로부터의 소주·상화(霜花)·포도주·후추·설탕 등의 도입이 식생활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반면에 고려의 음식이 원으로 전래되기도 하였으니, 고려병(高麗餠)이라 불리우던 유밀과를 비롯하여 고려하인(高麗蝦仁)·고려육(高麗肉)·고려유령(高麗乳領) 등과 같이 고기를 기름에 튀기거나 지지는 요리가 그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유밀과·떡·국수 등 곡물로 된 별식이 현대와 거의 다름없는 방법으로 조리되었고, 두부·콩나물과 같은 콩가공식품도 개발되었다. 또한 국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밥과 국이라는 기본적인 상차림의 구조가 정착되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소금의 전매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 식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고, 고려청자기의 놀라운 발달이 식생활을 문화적인 차원으로 높여 주었다.

식재료

4.1.1. 곡류

앞시대의 다양한 곡류가 고려 때에도 모두 생산되었다. ≪해동역사≫에 따르면 콩류로는 특히 검은콩과 완두콩이 생산되었고, 조는 가장 생산량이 많았다고 한다. 한편 이 시대에는 전쟁으로 굶주린 자가 많아 역사상 최초로 원(元)으로부터 강남미를 수입하기도 하였다.

4.1.2. 육류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했던 만큼 초기에는 여러번의 도살금지령이 내려져 식탁에서 고기를 찾기는 힘들었다. 그러난 13세기 중엽에 이르러 몽고인들과 겨루게 되면서 때로는 몽고의 풍속대로 육류로 된 음식을 만들어주어야 했으니, 이로부터 다시 육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 육류로 쓴 것은 소·말·돼지·닭·거위·오리였고, 서민들 사이에서는 개고기가 널리 식용되었다. 또한 토끼·사슴·멧돼지·노루·꿩 등 야생동물의 고기도 식용되었다. 이밖에 ≪고려사≫에는 신우(辛禑)왕이 여항(閭巷)에서 대나무장대로 참새를 나꾸어 구워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4.1.3. 수산물류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인들이 즐겨 먹던 수산물은 미꾸라지·전복·게·새우·굴·조개·소라·해조·곤포(昆布) 등이 었다. 이 가운데 특히 새우잡이가 성하여 젓갈을 만들어 귀천이 모두 즐겨 먹었고, 게잡이도 성하였다.

4.1.4. 과채류

고려 때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는 <가포육영 家圃六詠>에서 오이·가지·무·파·아욱·박 등 6가지 채소에 대하여 읊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6가지 채소는 이규보 자신이 그의 채마밭에 심어 식용하던 채소이니, 이것이 이 시대의 주된 채소였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 더덕·고사리·송이버섯 등도 식용되고 있었음이 이때의 문헌에서 산견된다.

과일로는 모과·배·오얏·살구·감·대추·밤·복숭아·앵두·능금·잣·유자·귤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 말엽에는 홍다구(洪茶丘)에 의해 수박이 재배되기 시작하였고, 포도도 포도주를 담가 먹을 정도로 성하였다.

4.1.5. 조미료

초·참깨·참기름 등과 함께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후추가 들어와 조미료로 이용되었다. 또한 단맛을 내는데는 꿀과 물엿이 쓰였고, 송(宋)나라나 남해상인으로부터 사들인 설탕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4.1.6. 가공식품

콩을 가공한 콩나물과 두부가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콩나물은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에 대두황(大豆黃)이란 이름으로 나오는데, 콩를 싹트게 하여 햇볕에 말려 약에 쓴다는 내용이 부연되어 있다. 두부는 고려 말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시에 등장하고 있는데, 연하고 물렁물렁한 두부의 특징은 물론 영양가가 많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

조리법

4.2.1. 다양화된 곡물음식

주식으로 쌀밥, 보리에다 피를 섞어 지은 잡곡밥, 팥죽·칼국수·메밀국수 등을 만들었다. 또한 별식으로 백설기떡·감설기떡·쑥떡·흰떡·꿀떡·수단(水團) 등의 떡류를 비롯하여 유밀과·다식(茶食)·상화·만두 등도 만들었다.

4.2.2. 국의 발달

이 시대로 오면 국이 크게 발달하였다. 된장국을 예로 들더라도 곤포로 다시를 낸 다음 된장을 넣어 끓이다가 파·마늘로 양념함으로써 지금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조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의 종류도 다양하여 몽고의 영향으로 만들게 된 설렁탕을 비롯하여 토란국·조갯국·아욱국·순채냉국·다시맛국·미역국 등이 있었다.

4.2.3. 기호식품의 발달

가장 보편적인 기호품으로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술이 이 시대로 오면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한림학사들의 공동작품인 <한림별곡 翰林別曲>에 등장하는 술만 예로 들더라도 잣술·솔술·예주·댓잎술·배술·오가피술 등의 이름이 보인다. 또다른 기호품으로는 우유가 있었다. 원나라와의 교류 이후 국가의 상설기관으로 우유소(牛乳所)가 생겨 이곳에서 우유를 공급했는데, 이때의 우유는 주로 낙죽(酪粥)의 원료로 쓰였다.

4.2.4. 육류 요리

설리자[雪裏炙]라 하여 소의 갈비나 염통을 기름에 양념하여 굽다가 반쯤 익으면 냉수에 담갔다가 다시 센불에 굽는 요리가 있었는데, 주로 술안주로 쓰였다.

저장법

4.3.1. 쌀

흙으로 높게 바닥을 만든 다음, 쌀가마를 쌓아 올려 그 위를 풀로 덮어 비바람을 막았다. 이러한 쌀 저장법은 가마니를 쌓아 올리는 방벙이 좋아서 공기가 잘 통하고 몇 해를 지나도 햅쌀과 같았다고 하니, 그 저장법이 매우 발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4.3.2. 밤

도기(陶器)에 넣어 흙속에 묻었다. 이렇게 저장한 밤은 해를 넘겨도 손상이 없었고 여름철에도 그 맛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4.3.3. 어육류

생선은 소금에, 육류는 계피같은 향신료에 각각 절여서 말려 저장했다.

4.3.4. 채소

무는 소금에 절였다가 채소가 없는 겨울에 먹었고, 무청은 장속에 넣었다가 여름철에 먹었다. 또한 채소를 소금에 절였다가 마늘·생강 등의 향신료를 넣어 버무려 두었다가 먹는 김치의 방법이 널리 쓰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교로 했던 만큼 유교적 정치윤리가 강조하는 사례(四禮), 그 중에서도 조상에 대한 봉제사(奉祭祀)와 가족제도에 따른 식생활이 크게 중요시 된 시대였다. 또한 중인(中人)계급의 대두로 인한 상하층의 식생활 교류가 일반 서민에게까지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외래식품이 널리 전래 보급되어 식생활의 다양화를 가져왔다. 특히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전래된 고추는 고춧가루로 가공되어 그 이전까지 담백미(淡白味)였던 우리 음식을 조화미(調和味)로 바꿈에 따라 한식(韓食)의 특성을 배가시켰고, 대표적인 부식인 김치를 완성시켜주었다. 3첩·5첩·7첩·9첩·12첩 등으로 구분된 첩수별 반상차림이 정착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 한마디로 조선시대는 한식 완성기라고 볼 수 있다.

식재료

5.1.1. 곡류

종류는 고려시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니, 적전(籍田 : 임금이 친히 경작하던 토지)에서는 벼·기장·피·당서·팥·콩·보리·수수·밀 등 9가지 품목의 곡식을 심었다. 이밖에 이 시대 중엽에 처음으로 옥수수가 옥촉(玉凊이란 이름으로 전래되었다.

5.1.2. 육류

일상적인 부식으로는 쇠고기·돼지고기·닭고기·꿩고기 등이 주로 쓰였고, 개고기가 여름철 보양식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이밖에 말고기를 포로 만들어 먹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 쇠고기 소비의 수요격증과 쇠고기 편식(偏食)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된다.

5.1.3. 수산물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조선시대의 어류는 근 50여 종으로 현재 어획되고 있는 어류가 거의 망라되고 있다. 특기할 사항으로는 오늘날 즐겨 먹는 명태가 조선조 중엽에 명천에서 태모(太某)라는 사람이 처음 잡아 그 이름을 명태라 했다는 것이다. 또한 멸치어업이 크게 성행하여 젓갈로 만들어져 새우젓과 함께 김치류에 들어간 것도 이때이다.

5.1.4. 과채류

19세기 초의 문헌인 ≪임원경제 林園經濟≫에 따르면 아욱·부추·갓·쑥갓·평지·시금치·상추·미나리·순채·여뀌·생강·두릅·고수풀 등 다채로운 채소류가 식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버섯류도 고려 때의 송이버섯 외에 표고버섯·석이버섯 등이 식용되었다. 한편 이 시대 중엽에는 우리 음식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준 고추가 전래되었고, 토마토가 남만시(南蠻枾)라는 이름으로, 호박이 호과(胡瓜)란 이름으로 각각 전래되었다. 또한 조엄(趙曮)에 의해 고구마가 감저(甘藷)란 이름으로 처음 이 땅에 들어왔고, 순조 때에는 감자가 북저(北藷)란 이름으로 전래되었다.

과일류는 고려시대부터 먹어오던 종류 외에 효종대에 중국의 빈과(ね0xFD29가 사과란 이름으로 전래되었고, 견과류인 땅콩이 낙화생이란 이름으로 이우촌(李雨村)에 의해 이 땅에 들어왔다.

조리법

조선조 후기로 오면 현재와 다름없는 여러가지 조리법을 볼 수 있다. 곧 발효법(醱酵法 : 술·장·초·김치), 굽는법(생선구이·고기구이), 말리는법(어포·육포·곶감·건율), 찌는법(고기찜·생선찜·떡류), 조리는법(생선조림, 연근·우엉 등과 같은 근채류 조림), 볶는법(고기볶음·나물볶음), 지지는법(생선지짐·나물지짐, 화전·부꾸미 등과 같은 떡류), 무치는법(나물), 끓이는법(죽·밥·탕류), 삶는법(수육·나물, 경단·단자 등과 같은 떡류), 짜는법(기름류), 가루를 내는법(깨소금·고춧가루·밀가루) 등이 모두 이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장법

5.3.1. 어육류

생선류는 말리는 방법 외에 생선을 독에 넣고 소금을 뿌린 다음 땅에 묻는 염해법(鹽醢法)이 있었다. 또한 육류도 말리는 법과 함께 연기에 쏘이거나, 고기에 술을 뿌려 삶아서 묻는 법, 장에 묻어두는 법 등 다양한 저장법이 개발되었다.

5.3.2. 과일

감·밤·대추 등은 햇볕에 말려서 저장하였다. 말린 과일은 형태와 맛이 본래의 과일과 크게 달라 그 이름도 곶감[枾諸]·율저(栗諸)·조저(棗諸)라고 달리 불렀다.

5.3.3. 채소

고춧가루의 보급으로 채소를 가공 저장하는 김장법이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정착되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 김장은 1년의 식생활 중 가장 중요한 연중행사였는데, 그 시기는 <농가월령가> 10월조에 “무·배추 캐어들여 김장을 하오리라….”라고 했듯이 대개 음력 10월이었다. 그리고 김장독은 추위에 얼어터지지 않도록 짚으로 싸서 땅에 묻거나, 짚으로 삼각형의 가가(假家)를 지어 그 속에 보관하였다.

근대 이후의 음식문화

개화기로 오면 서양화의 물결이 거세어지면서 우리 음식은 서양 음식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이즈음 확대된 일본의 세력 아래서 생활의 핍박이 서민의 식생활을 곤궁으로 몰아갔다. 식생활의 궁핍화는 그후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로 그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한층 가중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식생활 속에서도 19세기 말기에 태동하기 시작한 서양음식과 서구식 영양이론이 점점 한국내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본인에 의해 가공식품이 제조되어 식생활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었다.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광복 직후의 식생활은 최악의 극빈상태에서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굶주림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서구로부터의 원조물자, 보리혼식, 분식장려 등으로 식량난 해결에 박차를 가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식량난 해결에 주안점을 두는 한편 국민영양에도 관심을 두어 식생활 개선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식생활 개선은 서구식 식습관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1970년대로 오면 공업화의 양상으로 식생활도 공업화 내지 산업화 되었다. 이에 따라 즉석식품이 식생활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로 오면 동물성식품의 소비과다, 지방질의 과잉섭취 경향으로 성인병의 발병률이 증가되면서 서구식 식습관에 대한 반성이 촉구되었다. 또한 가공식품의 해독에 대한 논란도 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식품에 대한 역반응으로 건강식품, 무공해식품, 자연식품 등에 관한 관심과 함께 보다 합리적인 식생활이 모색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식재료

6.1.1. 육류

쇠고기·닭고기·돼지고기·오리고기·양고기 등이 선호되고 있다. 이중 쇠고기를 찾는 경향은 절대적이어서 수입까지 하고 있다.

6.1.2. 과채류

재래의 과채류 외에 서양과채류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 종류를 보면 케일·캐비지·셀러리·파슬리·아스파라가스·레터스·치커리·래디시·비트·피망·콜리플라워·브로콜리·바나나·파인애플·파파야·멜론·키위·레몬·오렌지·자몽·바바코 등이다.

6.1.3. 가공식품

식품산업의 발전으로 다양한 가공식품이 생산 공급되고 있다. 그 종류는 밀가루·식빵·과자·라면·인스턴트면류·전분·물엿 등의 탄수화물 가공품을 비롯하여 햄·소시지·베이컨·수산물통조림 등의 동물성 가공품, 분유·처리우유·유산균발효유·아이스크림 등의 유가공품, 콩기름·쇼트닝 등의 유지류 가공품, 사이다·콜라·쥬스 등의 청량음료, 탁주·청주·소주·맥주·위스키 등의 알콜음료, 커피·홍차·녹차 등의 차류, 글루타민산소오다·간장·토마토케첩·마요네즈 등의 조미료 식품이 있다.

조리법

6.2.1. 주식류

밥(흰밥·팥밥·콩밥·오곡밥), 죽(흰죽·두태죽·장국죽·어패류죽·비단죽), 국수(온면·냉면), 만두(어만두·준치만두·규아상·편수)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6.2.2. 부식류

국(맑은장국·토장국·곰국·냉국), 찌개(된장찌개·고추장찌개·젓국찌개), 전골(낙지전골·버섯전골·신선로), 찜(육류찜·어패류찜·채소류찜), 선(가지선·오이선·애호박선·어선), 조림(생선조림·육류조림), 초(전복초·홍합초·삼합초), 저냐(육류저냐·채소류저냐·어패류저냐), 구이(육류구이·생선구이·더덕구이·김구이), 적(산적·누르미), 편육, 족편, 나물(숙채·생채·잡채), 회(생회·숙회), 포(육포·어포), 젓갈(어패류젓·알젓), 김치(배추김치·보쌈김치·깍두기·동치미·갓김치·두릅김치)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6.2.3. 별식

떡(시루떡·단자·도병·전병)과 과줄(유밀과·다식·강정·정과·과편·숙실과)이 만들어지고 있다.

6.2.4. 후식

수정과, 화채(오미자화채·과즙화채·꿀물화채), 차(율무차·모과차·유자차·솔잎차)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음식문화의 특성

절식은 우리의 책력인 태음력을 기준으로 하여 1년을 24절기로 나누고, 이 절기에 따른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산되는 식품으로 음식을 만들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가며 먹는 것이다. 각 절기별 음식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절기별 음식

입춘일

이른 봄 눈이 녹을 때 산 속에서 자라는 산개(山芥)를 비롯하여 승검초·파싹 등을 살짝 데쳐 초장에 곁들여 절식으로 삼는다.

설날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이날은 흰떡국을 끓여 먹고, 약식·인절미·단자류·저냐·편육·강정·식혜·수정과 등 여러가지 음식을 마련하여 세찬상에 올린다.

상원(정월 대보름)

오곡밥·약식·부럼·귀밝이술·묵나물·복쌈 등이 절식으로 마련된다. 이 가운데 부럼은 1년 동안의 태평을 기원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주십사 하고 축수하는 의미에서 견과류를 깨 먹는 것이다. 또한 묵나물은 여름에 나오는 채소를 말려 묵혔다가 이날 삶아서 볶은 것이다. 이밖에 귀밝이술은 귀가 밝아진다고 하여 데우지 않은 술을 대보름날 아침에 마시는 것이며, 복쌈은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참취나물·배춧잎·김 등으로 밥을 싸서 먹는 것이다.

중삼절(삼짇날)

진달래꽃을 따다가 화전을 부쳐 먹거나,두견주를 담가 마신다. 또 오미자 국물에 녹두국수와 잣을 띄운 화면(花麵)을 먹기도 하고, 녹두국수에 붉은 물을 들여 꿀물에 띄운 수면(水麵)을 먹기도 한다.

등석일(초파일)

이때쯤 돋어나는 느티나무싹을 따다가 멥쌀가루에 섞어 느티떡을 만들어 먹거나, 볶은 콩, 삶은 미나리 등을 절식으로 삼는다.

단오

수리취절편·각서(角黍)·제호탕 등이 절식으로 꼽힌다. 이 중 수리취절편은 쑥을 넣어 만든 떡을 수레바퀴 모양으로 찍어 낸 절편이고, 각서는 밀가루 반죽을 둥글게 빚어 소를 넣은 다음 양쪽에 뿔이 나게끔 오무려 싼 만두의 일종이다. 이밖에 제호탕은 오매육·초과·백단향·축사 등을 곱게 빻아 꿀과 함께 고아서 물에 타 마시는 청량음료이다.

유두일

수단(水團), 건단(乾團), 상화병(霜花餠), 연병(連餠)등을 만들어 절식으로 삼는다. 수단은 멥쌀가루나 찹쌀가루를 쪄 구슬 처럼 둥글게 빚은 다음 이것을 다시 꿀물에 넣고 얼음에 채운 것인데, 계절적으로 유두일(음력 6월 15일)이 햇보리의 수확 시기이므로 보리로 만들기도 한다. 건단은 수단과 같은 방법으로 하되 떡을 물에 띄우지 않은 것이다. 상화병은 밀가루에 술을 넣고 반죽하여 부풀린 다음 소를 싸서 찐 음식이고, 연병은 밀전병을 부쳐 소를 넣고 싸서 각기 다른 모양으로 오무려 싼 음식이다.

삼복

하지(夏至)로부터 세째 경일(庚日)을 초복(初伏), 네째 경일을 중복(中伏), 입추(立秋)로부터 첫째 경일을 말복(末伏)이라고 하는데, 이 초복·중복·말복을 가리켜 삼복(三伏)이라고 한다. 삼복 기간은 여름 중에서도 가장 무더운 때이므로, 더위를 이겨내기 위한 절식으로 개장국·장어국·육개장국·삼계탕· 임자수탕 등을 만든다.

칠석

절식으로 밀전병과 밀국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날 이후가 되면 밀가루에서 밀냄새가 나기 때문에 마지막 밀음식 향연이 되는 셈이다.

백중

일명 백중(百衆)·백종(百種)·중원(中元)이라고도 한다. 이날은 고래로부터 남녀가 모여 음식을 차려놓고 노래와 춤을 즐기던 날이나, 신라에서 고려로 오면서 불교가 성해짐에 따라 우란분재(盂蘭盆齋 : 조상의 초혼을 공양하는 것)와 같은 불교의 유풍이 뒤섞이게 되었다. 절식으로는 각종 과일과 튀각·부각 등과 같은 사찰 음식이 전해진다.

추석

설날과 함께 우리 민족의 2대 명절로, 이 때(음력 8월 15일)쯤에는 햇곡식이 익을 때이므로, 이 햇곡식으로 송편을 빚어 먹는다. 또 토란이 많이 나는 철이므로 토란국을 끓여 먹기도 한다. 이 밖에 햇버섯, 도라지, 쇠고기 등을 갖은 양념을 하여 볶아 꼬챙이에 꿴 화양누르미, 살이 오른 닭으로 만든 닭찜 등도 만들어 절식으로 삼는다.

중구(중양절)

황국이 은은한 향기를 내 뿜으며 필 때이므로 이것을 따서 국화전을 지지고, 국화주를 담근다. 또한 이 때쯤 무르익는 배와 유자로 화채를 만들기도 한다.

상달

음력 10월을 일 년 12달 중 첫째가는 달이라고 하여 상달이라 한다. 이때에는 고사를 지내기 위하여 백설기나 팥시루떡을 찐다. 또 신선로가 절식으로 전해오고 있다.

동지

찹쌀가루로 새알심을 빚어 넣어 끓인 팥죽을 절식으로 삼는다. 팥의 붉은 빛이 액을 막아준다는 속신에서 비롯된 절식 풍속이다.

납일

동지가 지난 뒤 셋째 미일(未日)을 납일(臘日)이라 한다. 이날이 되면 궁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큰 제사를 지냈는데, 특히 사냥한 산돼지와 산토끼를 제물로 사용하였다. 이날은 또 참새를 잡아 어린이들이 먹으면 마마를 깨끗이 한다고 하여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기도 하였다. 절식으로는 골동반과 골무떡이 있다.

지역별 향토음식

우리나라는 아시아 동부에 위치한 반도로 삼면이 바다이다. 또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으로서 사계절의 구분이 확연하고 지역적인 기후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각 지방마다 특성있는 식품 재료가 생산된다. 이러한 각 지역의 식품 재료는 자연과 생활의 조화를 꾀해 왔던 우리 선조들에 의해 그 지방의 풍미를 대표하는 독특한 음식으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향토 음식이다. 각 도별 향토음식의 특성과 종류는 다음과 같다.

경기도

서울과 개성의 음식은 사치스럽고 복잡한 편이다. 그러나 그 외의 지방은 전체적으로 음식의 풍이 소박하고, 간은 중간 정도이며, 맛은 구수하고 양은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음식은 해삼홍합쌈·편수·탕평채·무찜·제육저냐·개성약과·개성물경단·우매기 등이다.

강원도

영서지방은 감자·옥수수·메밀·도토리·버섯 등으로 만들어진 음식이 많고, 영동지방은 해산물로 된 음식이 많다. 그 특성은 소박하고 구수하다. 감자부침·쇠미역쌈·능이버섯회·도토리묵·지누아리장아찌·서거리김치·명태식해·찰옥수수시루떡·메밀총떡 등이 대표적인 향토식이다.

충청도

주부식은 물론 별식에 이르기까지 늙은 호박을 많이 쓰는 것이 이곳 음식의 특성이다. 그리고 국이나 찌개의 맛을 내는데는 쇠고기보다 닭·소합·굴 등을 쓰고 또 된장을 많이 이용하는데, 이렇게 끓인 국물은 그 맛이 매우 구수하다. 음식의 양은 충청도의 인심을 반영하듯 많은 편이다.

이 지방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은 새뱅이(새우)지짐이·호두장아찌·늙은호박찌개·굴냉국·홍어어시욱·쇠머리떡·호박떡 등이다.

경상도

음식의 특성은 대체로 짜고 맵다. 곡물 음식 중에는 국수를 즐기는데, 날콩가루를 넣은 칼국수를 특히 좋아한다. 또한 생선국에 소금간을 하는 특이한 조리법도 있다. 대구육개장·안동식혜·곰치장아찌·당귀장아찌·토란줄기찜·갖은정과·모듬백이·부편 등이 대표적인 향토음식이다.

전라도

자연적 특성에 의해 먹을 거리가 풍부한데다, 예부터 부유한 토반들이 대를 이어 살면서 좋은 음식을 전하고 있어 어느 지방보다도 음식이 사치하고 가짓수가 많기로 유명하다. 음식의 맛은 간이 세고 매운편이며 김치는 국물이 없는 것이 특성이다. 대표적인 향토 음식은 전주비빔밥·순창고추장·매생이 국·꽃게미역국·생이젓(토하젓)·죽순탕·만나지·파만두·대합조개만두·풋마늘갑오징어산적·감단자·감고지떡·익산섭전 등이다.

제주도

음식의 특성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편이다. 주식으로는 해물을 넣어 쑨 죽이 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부식도 해산물을 이용한 것이 많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전복죽·전복소라회·자리회·옥돔미역국·오분자기찌개·자리젓·돼지족탕 등과 얍개·중개·솔편 등의 향토떡이 있다.

황해도

음식의 특성은 구수하고 소박하며, 떡이나 만두 등의 음식은 그 크기가 매우 큼직하다. 칼국수나 만두에는 닭고기를 많이 쓰며,김치가 맑고 시원하여 국수를 김치나 동치미 국물에 마는 경우가 많다. 음식의 간은 별로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것이 충청도 음식과 비슷하다. 연안식해·강엿돼지족·호박짠지된장국·황해도고기전·김치순두부·오쟁이떡·연안인절미· 혼인절편·수수무살이 등이 대표적인 음식이다.

평안도

이 지방의 산세를 반영하듯 풍성하고 대륙적이며 겨울에 먹는 음식이 다른 지방보다 발달되어 있다. 음식 중에는 국수를 가장 즐겨 먹는데, 겨울에는 동치미 국물이나 꿩탕에 만 냉면, 여름에는 어복쟁반이라는 뜨거운 국수를 먹는다. 음식의 간은 슴슴하여 맵고 짜게 먹는 일이 드물며, 양은 푸짐한 편이다.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는 내포중탕·무곰·어복쟁반· 동치미냉면·굴린만두·녹두지짐·노티 등이 있다.

함경도

음식의 특성은 장식이나 기교가 없이 소박하며, 크기는 큰 편이다. 간은 세지 않고 맵지도 않으며, 북으로 갈 수록 담백한 맛을 즐긴다. 그러나 이 지방을 대표하는 함흥냉면에는 고춧가루양념이 애용되어 ‘다대기’라는 말이 이곳에서 나왔을 정도이다. 함흥냉면·가자미식해·강냉이밥·북어찜·섭죽·되비지찌개·순대·가랍떡 등이 대표적인 향토식이다.

현황과 전망

오늘날 우리 음식은 거주지의 변화, 세대가족의 변화, 생활의 레저화, 여성의 사회진출 이라는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데다가 먹기도 번거럽다는 이유에서 이다. 대신 조리시간과 먹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외식산업의 한 업태인 패스트푸드가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패스트푸드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980년의 아시안게임과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패스트푸드 업자들이 외국의 유명 메이커와 상표 및 기술제휴를 맺고 우리 국민 속으로 파고들면서부터이다. 게다가 불어닥친 수입개방은 외래 음식문화의 범위를 한층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몇 년전에 신세대들을 대상으로 한 음식선호도 조사결과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김치이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햄버거와 피자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나온 바 있다.

그러나 다행이도 이들 패스트푸드가 비만의 원인이 되고 각종 성인병에도 좋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우리 고유의 음식쪽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외국인들도 우리 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어 전통 비빔밥이 기내식(機內食)으로 선정되는가 하면, 우리 음식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김치가 일본의 ‘기무치’를 누르고 세계적인 음식으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가 좀더 우리 고유의 음식을 세계인에게 알리고 또 그들의 식성에 맞게끔 문제점을 보완해 나간다면, 우리 음식의 세계화는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한국식생활사』(강인희, 삼영사, 1990)
『한국고고학개설』(김원룡, 일지사, 1986)
『고려이전의 한국식생활사연구』(이성우, 향문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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