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유당관북유람일기』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수필집이다. 단권의 필사본으로 ‘의유당일기’라고도 한다. 지은이는 이희찬의 부인인 의유당이라는 견해와 신대손의 부인인 의령 남씨라는 견해가 있다. 이 책의 차례는 낙민루·북산루·동명일기·춘일소흥·영명사득월루상량문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 중 「동명일기」는 동명의 해돋이 장관을 서술한 글로 이 책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이 책은 소재의 특이성, 사물을 관찰하는 격조 높은 안목과 탁월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기행·전기·번역 등을 포함하는 18세기 여류문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단권. 필사본. 일명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라고도 한다. 지은이에 대하여는 두 갈래의 견해가 있다. 원래 이 작품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47년 이병기(李秉岐)가 작품 원문에 교주를 붙여 출판하면서이다. 이 때 작자를 연안 김씨(延安金氏)인 의유당으로 밝혔고, 그 지은 연대 및 짓게 된 동기에 대하여는, 의유당의 남편인 이희찬(李羲贊)이 1829년(순조 29) 함흥판관으로 임명받아 부임할 때 함께 따라가서 짓게 된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 뒤 이연성과 류탁일 등이 다른 문헌자료와 여러 가지 고증 결과를 통하여 『의유당일기』의 작자는 의령 남씨(宜寧 南氏)라는 다른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 견해대로 작자가 같은 당호를 가진 의유당 의령남씨라고 한다면, 그의 남편은 신립(申砬)의 8대손이며 함흥판관을 지낸 신대손(申大孫)이다. 즉, 부인 남씨가 남편인 신대손이 함흥판관(영조 45∼49)으로 부임해갈 때 함께 따라가서 지은 것이 된다. 따라서 작품 창작연대도 1772년(영조 48)이 된다.
이 책의 차례는 낙민루 · 북산루 · 동명일기(東溟日記) · 춘일소흥(春日消興) · 영명사득월루상량문(永明寺得月樓上樑文)의 순으로 되어 있다. 「낙민루」는 지은이가 기축년 8월 서울을 떠나 남편의 임지인 함흥에 도착하여 유명한 만세교와 낙민루를 찾아 구경한 내용이다. 특히, 낙민루와 그 일대의 경관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북산루」는 지은이가 북산누각을 찾아가 기생들의 풍악소리를 들으며 즐기던 일과, 종일 놀고 날이 어두워서 돌아올 때는 청사초롱 수십 쌍을 기생들에게 들리고 풍악을 울리며 돌아오던 황홀한 기분을 서술한 것이다.
「동명일기」는 『의유당일기』 중에서도 가장 장문의 글로, 『의유당일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지은이가 동명의 해돋이와 달맞이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그의 남편인 판관을 졸라서 허락을 받고 길을 떠나 왕래하는 사이에 보고 겪은 일들과 해돋이의 장관을 서술한 글이다. 「춘일소흥」은 개인의 전(傳)을 기록한 것이다. 김득신(金得臣) · 남호곡(南壺谷) · 정유악(鄭維岳) · 정탁(鄭琢) · 정인홍(鄭仁弘) · 김승평(金昇平) · 조안렴(趙按廉) · 유부인(柳夫人) · 이번(李璠) · 이탁(李鐸) 등 특수한 사례들을 열거, 정리해 놓고 있다. 「영명사득월루상량문」은 대동강 북편에 세워진 득월루의 상량문이다.
이 작품은 조선조 여인의 글로는 매우 개성적이고도 우수한 작품이다. 소재가 특이할 뿐 아니라, 사물을 관찰하는 격조 높은 안목과 탁월한 표현력은 지은이의 문학적 역량이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이병기는 「동명일기」를, “그 신묘한 붓질은 남구만(南九萬) · 박성원(朴聖源) 따위의 「북정록(北征錄)」으로 견줄 것도 아닐 뿐더러 「한중록(恨中錄)」과도 다른 찬란한 색채가 있다. …… 그때 우리글을 적던 이가 얼핏하면 한문어투나 따다 썼지만 의유당은 그렇기는커녕 하찮은 한문 그것까지도 우리말 글로 하여 더욱 멋이 나게 하였다.”라고 평하였다. 별로 많지 않은 조선조 여성의 수필문학 작품으로 그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기행 · 전기 · 번역 등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작품으로 18세기 조선조 여류문학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