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두산(斗山). 평안남도 강동(江東) 출생.
평안남도 강동(江東) 출생. 1936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법문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38년부터 혜화전문에 재직하면서 항일 지하써클을 지도하다가 1941년에서부터 1943년까지 좌익지하운동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중앙집행위원회 서기국 서기를 지냈다.
같은 해 북한으로 가서 조만식의 <평양민보> 주필을 거쳐 1946년 조(朝) · 소(蘇) 문화협회부위원장을 지냈고, 1947년 김일성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했으나, 그 무렵 북한공산체제에 회의를 느끼고 1950년 6 · 25전쟁 때 월남하였다.
1951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일하였고, 1952년 경북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53년 한국내외문제연구소를 개설하고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1954년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55년 국방대학원 고문교수를 겸임하였다.
1955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 1957년 민주혁신당 정치위원 및 정책위원장을 지냈고, 1958년 진보당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으나 1959년 무죄 방면되었다.
1959년 동국대학교 도서관장에, 1960년 동국대학교 교수에 취임하였다. 1961년 통일사회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나며 혁신계 전면 엄단조치에 의해 1962년 구속되었다가 1964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72년 대중당 대표최고위원 권한대행과 민족통일촉진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81년 민주사회당 고문, 독립동지회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3년 민주사회주의연구회를 창립하고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86년 여운형탄생1백년기념사업회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표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작금(昨今)의 내외 정세와 한반도 통일』(1985), 역서 『볼셰위즘 정치 이론의 비판』(195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