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판서, 예문관제학, 정헌대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헌종 초년에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춘천부사 자리가 비어, 조정에서 모두 그를 추천했으나 극력 사양하다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할 수 없이 부임하였다. 마침 큰 흉년이 들었는데, 관전(官錢)을 내어 쌀을 팔아 백성들을 급히 구제하였다.
그 뒤 10여 년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다가 1849년(헌종 15)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제수받았다. 이 때 개성인삼을 가지고 홍삼을 만들어 팔던 당시 역인(驛人)들의 포소(包所) 세금 포탈을 엄히 다스렸다.
1852년(철종 3) 승정원좌승지 ·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를 제수받고, 1854년에는 도총부도총관이 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이어 형조판서 · 지경연춘추관사가 되었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전병사 이근영(李根永)의 탐학을 탄핵하였다.
1864년(고종 1) 지종정경부사(知宗正卿府事)가 되고 다시 대사헌 · 좌참찬 ·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이조판서 · 홍문관제학 · 예문관제학 · 동지성균관사를 지냈다. 1866년에는 특지(特旨)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이해 가을 이른바 병인양요가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시문 10권과 고금서초(古今書鈔) 100여권, 『야사초(野史鈔)』 몇 권이 후손의 집에 소장되어 있다 한다. 편서(編書)로는 『정주도회과작(定州都會科作)』 1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철종실록(哲宗實錄)』
- 『기려수필(騎驢隨筆)』
- 『대한계년사』(정교, 국사편찬위원회, 1957)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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