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8년(중종 23) 식년시 생원 · 진사시에서 전체 6등, 39등으로 각각 합격했다. 3년 뒤 1531년(중종 26) 식년시 문과(E0019419)에서 갑과 3등 탐화랑(探花郞)으로 입격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기록에서 확인되는 첫 관직은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다. 이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거쳐 헌납(獻納), 교리(校理), 장령(掌令) 등의 관직을 맡았다.
1540년 제주목사(牧使)에 제수되었다. 당시 대간 직을 주로 맡았고 성품과 문명(文名)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조사수가 바다를 건너 이동해야 하는 제주목사로 임명되자 당시의 여론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 해 제주도 변경 지역에 일본인들과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생기자 제주 목사를 무신이었던 윤중형(尹仲衡)으로 교체하면서 내직이었던 예조 참의(參議)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파견 되었다. 1543년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되면서 다시 외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명종 대에는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병조 참의,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겸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 이조 참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홍문관(弘文館) 부제학 등의 중요 관직들을 역임하였다. 1557년(명종 12)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 해결을 위해 명나라에 주청사(奏請使)로 파견되었다. 1558년 57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