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천사는 1760년(영조 36) 도성 안의 하수도인 개천(開川)을 준설하여 소통시키며, 백악(白岳)·인왕(仁旺)·목멱(木覓)·낙산(駱山)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1411년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여 백악·인왕 등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민가의 하수구에서 배출되는 물을 처리하는 인공 배수로를 만들었다. 300여 년간 개천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오물과 퇴적물로 수구가 막히고 악취도 심해져 1759년 준설에 착수하여 57일 만에 준설과 제방 석축의 보수 등 작업을 완료하였다. 준설을 완료한 후 상설기구로 설치되어 준천 관리와 4산 보호를 담당하였다.
본래 서울은 산간분지인 까닭에 백악 · 인왕 등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민가의 하수구에서 배출되는 물의 처리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에 1411년(태종 11) 해결책으로 도성 한가운데에 인공으로 큰 배수로를 팔 것을 결정하였다. 우선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해 이를 전담하게 하고 이듬 해 삼남(三南)의 군인을 징발해서 작업에 착수한 지 1개월 만에 준공을 보았다.
수로는 대광통(大廣通 : 지금의 廣橋)에서부터 도성을 동서로 관통해 오간수문(五間水門)을 지나 다시 동남쪽을 거쳐 중랑천(中浪川)에서 북한산 · 도봉산 · 수락산 등에서 흘러내린 물과 합류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였다. 제방은 장의동구(藏義洞口)∼종묘동구(宗廟洞口) 사이와 문소전(文昭殿)∼ 창덕궁 사이는 돌로 쌓고, 종묘동구∼수구문(水口門) 사이는 나무로 쌓았으며, 주요교량은 석축(石築)해 전체적으로 개천이라 불렀다.
1444년(세종 26) 이현로(李賢老)가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명당터의 물을 맑게 하기 위해 개천에 오물을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금령(禁令)의 발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집현전교리 어효첨(魚孝瞻)은 민가에 불편을 줄 뿐더러 사실상 금령의 실효가 없을 것임을 들어 반대해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 뒤 약 300여 년간 개천의 관리가 소홀해 오물과 퇴적물로 수구가 막히고 하상이 높아져 평소에도 악취가 심하였다. 비가 많이 오게 되면 개천이 범람해 가옥의 침수가 잦고 또 우물마저 더럽혀져 토질병(土疾病)을 발생하게 하는 등 민간에 큰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준설에 따르는 비용이 막대해 준설의 필요성은 절감하면서도 이를 착수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759년(영조 35) 좌의정 신만(申晩)의 발의로 홍봉한(洪鳳漢) · 이창의(李昌誼) · 홍계희(洪啓禧)를 준천당상(濬川堂上)에 임명, 준천에 필요한 노동력 및 소요경비 등의 산출을 위한 절목(節目)을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듬 해인 1760년 3월 준설에 착수, 57일 만에 준설과 제방 석축의 보수 등 모든 작업을 완료하였다. 여기에 동원된 인력은 방민(坊民)으로서 자원한 자와 품삯을 받고 고용된 고정(雇丁)을 합쳐 연인원 20만 명에 이르며, 투입된 비용은 전(錢) 3만 5,000여민(緡)과 쌀 2,300여포(包)였다.
이 때의 준천사업은 비용의 낭비가 많다는 비난과 공사가 부실해 한번 비가 오면 허사가 되고 말 것이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왕의 적극적인 후원과 준천당상 홍계희의 열성으로 결국 완공을 보았다. 준설을 완료한 뒤 홍계희는 그 동안의 경위를 밝힌 『준천사실(濬川事實)』을 편찬하였다. 또한 준천의 효과를 지속하고 또다시 오물이나 모래가 쌓여 수로가 막히는 피해를 없애기 위해 상설기구로서 준천사를 설치하고 4산의 보호를 아울러 책임지게 하였다.
관원으로는 도제조(都提調, 정1품) 3인, 제조(종2품 이상) 6인, 도청(都廳, 堂上官) 1인, 낭청(郎廳, 정7품) 3인을 두었다. 이들은 모두 겸임관으로 도제조의 경우 현직의 3의정(議政), 제조는 병조판서 · 한성부판윤 · 훈련대장 · 금위대장 · 어영대장 및 비변사의 제조 1인이 겸하고, 도청은 어영청의 천총(千摠)이, 낭청은 삼도(三道)의 참군(參軍)이 겸하였다. 소속된 이속(吏屬)으로는 서리 5인(兵曹, 漢城府, 訓鍊 · 御營 · 禁衛의 三軍門에서 각 1인씩 移差), 고직(庫直) 1인(三軍門에서 돌아가면서 移差), 사령(使令) 4인(兵曹, 三軍門에서 각 1인씩 移差), 수표고직(水標庫直) 1인(本司의 庫直이 兼)으로 하였다.
한편 준천사는 준설시 사용하고 남은 1만 2,000냥을 미곡(米穀) 4,000석으로 바꾸어 이를 자본으로 장리(長利)를 놓아 거기서 나오는 이자로써 해를 걸러 한번씩 정기적으로 소규모의 준천과 제방수리를 실시하였다. 또한, 1789년(정조 13) 한강의 부교(浮橋) 조성과 조운(漕運)을 관장하는 주교사(舟橋司)가 병설기구로 설치됨에 따라 이에 관한 임무까지 아울러 담당하였다. 적어도 100년은 가리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1832년(순조 32) 다시 개천이 막히는 사고가 일어나 준천사의 주관하에 약 7만 5,000여냥을 들여 대대적인 준천사업이 다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인력과 물력을 투입한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철종 때에는 준천을 주관한 준천사의 제조가 문책되고 또 공정(工程)을 분담했던 어영청 관할의 준천이 부실함을 들어 어영대장이 파면되기도 하였다. 준천사는 본래 문신의 관청이었다. 그러나 주교사와 병합한 뒤에는 업무가 문관이 담당하기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해 1865년(고종 2) 무관의 관청으로 이속되었다. 그 후 다시 1882년 사무가 주로 청계천의 공사에 치중된다 하여 한성부에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