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흥(江興). 초명은 선로(善老). 아버지는 이광후(李光後)이다.
1438(세종 20) 식년 문과에 급제 후 집현전교리가 되었다. 1447년(세종 29) 부교리 때, 왕의 즉위 시 관복(冠服)과 상복(喪服)의 관례에 대해 대신들과 함께 주자의 설을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 언문청에서 활동하면서 『동국정운』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듬해 병조정랑이 되고, 집이 없는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터를 안국방(安國坊)으로 정해 주기도 했으나, 이 해 환관 최읍의 청탁을 받아 매관죄로 탄핵을 받았다. 1449년(세종 31) 병조정랑으로 하번갑사(下番甲士)인 귀화인을 보고하지도 않고 사직(司直)에 임명했다가 순창(淳昌)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전 대부(隊副) 이양무(李陽茂)에게 뇌물을 받고 대장(隊長)으로 승진시켜 준 여죄가 다시 드러나 극형으로 다스리도록 탄핵받았으나 세종대 원종공신인 아버지 덕으로 남원으로 이배된 뒤 다시 사천으로 옮겨졌다.
그 뒤 복직되어 문종대에는 승문원교리, 행 부사직을 거쳐 사직,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 등을 지냈다. 그리고 평소 정략적인 재주가 많던 그는 안평대군과 시화(詩畵)로써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일찍이 지리 · 복서(卜筮) 등을 탐구하였고, 시(詩) · 화(畵)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무예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이는 그는 안평대군에 접근해 단종대에는 정략적인 참모로 활약하였다.
즉, 당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과의 정권싸움에 힘을 얻기 위해 중국 북경에 사은사로 수양대군이 가려는 계획을 안평대군으로 바꾸려고 기도하였다.
또 수양대군의 세력결집을 막기 위해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皇甫仁)에게도 접근해 이들의 힘을 빌어 대군(大君)이나 의정부 당상관들에게 분경(奔競)을 금하도록 사헌부에 압력을 가하는 등 수양대군으로의 권력이동을 막는 데 막후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있던 중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으로 참형되었다. 한편 그는 풍수지리설에도 뛰어나 세종대에는 왕궁의 명당을 유지하기 위해 도성 가운데를 둘러 동으로 흘러 영제교(永濟橋) 동남에서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청계천(淸溪川)의 물을 맑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즉, 개천에 오물 투기를 금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집현전교리 어효첨(魚孝瞻) 등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풍수지리학적인 데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영조대 준천사(濬川司)를 개설할 때 300여 년 동안 쌓여온 개천의 오물과 흙을 제거하기 위해 국가적인 사업으로까지 커진 것을 보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정조대에 단종을 위해 절개를 지킨 자들의 복권을 위한 『어정배식록(御定配食祿)』의 별단에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쟁의 패배자인 안평대군의 편에서 활동한 죄로 역사적 평가가 대단히 부정적으로 나타나 있는 측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