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9년 11월 28일 예종(睿宗, 14501469, 재위 14681469)이 승하하자 의경세자(懿敬世子, 1438~1457, 추존왕 덕종) 묘소인 경릉(敬陵) 북쪽에 산릉의 자리를 정하였다.
예종 창릉(昌陵)에 부역한 역군(役軍)은 7천 명에 이르렀는데,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광릉(光陵) 조영,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 영릉(英陵) 천릉 등이 창릉 조영 이전에 연달아 있어서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470년 2월 5일에 예종을 창릉에 안장하였다.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는 1498년 12월 23일에 승하하였으며, 1499년 2월 14일 창릉에 장사를 지냈다.
1754년에 건립된 창릉 표석 음기(陰記)에는 예종릉을 ‘경릉 북강 간좌지원(敬陵 北岡 艮坐之原)’, 안순왕후릉을 ‘대왕릉좌강간좌지원(大王陵左岡艮坐之原)’이라고 하여 예종릉이 서쪽, 왕후릉이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고양현(高陽縣)은 창릉과 경릉이 안치된 땅이라고 하여 1470년 군(郡)으로 승급되기도 하였다. 창릉은 조선시대 내내 관리되었으며, 1754년 표석을 건립하였다. 1756년 4월 26일 창릉에 화재가 발생해 정자각(丁字閣)이 사라져 없어지자, 6월 2일에 정자각을 다시 지었다.
예종릉과 안순왕후릉의 돌거리 배치는 같다. 전체가 상중하계(上中下階) 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계에 난간을 두른 봉분과 양석(羊石), 호석(虎石), 곡담, 혼유석(魂遊石)과 망주석(望柱石)이 건립되어 있다. 중계에는 장명등(長明燈)과 문석인(文石人), 석마(石馬), 하계에는 무석인(武石人)과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정자각은 두 능의 남쪽 중앙에 있으며 비각(碑刻)과 홍살문이 남아 있다. 『창릉지(昌陵誌)』에는 정자각 남쪽 좌우에 수복방(守僕房)과 수라간(水剌間)이 그려져 있어서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