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자리는 남쪽으로 경사가 완만한 구릉의 정상부에 분포한다. 배치형태에서 일정한 규칙은 없고, 암반형의 부식이 덜된 화강암층을 수직으로 굴착해 조성하였다.
제1호와 제2호 집자리는 표면의 유실로 집자리의 깊이가 10㎝ 내외만 남았으나 제3호 집자리 등 나머지는 대체로 70㎝ 정도의 깊이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제5호 집자리는 경사의 윗부분에서 100㎝ 가까운 깊이를 유지하기도 한다.
기본적 평면형태는 원형이다. 제4호 집자리는 방형이다.
다만 방형의 내각을 부드럽게 말각하였다. 규모는 대체로 직경 5m 내외이다. 기둥자리는 집자리마다 차이가 있다. 제1호와 제2호 집자리의 기둥자리 2개는 위치와 간격이 서로 상통하나 구체적 형상을 만들기 어렵다.
제3호 집자리는 주거 내에 사각으로 규칙적 배열을 보이고 있고, 제4호 집자리는 삼각형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한편, 제5호 집자리는 내부에 기둥자리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집자리에는 중앙부에 바닥을 약간 판 상태로 구덩이가 남아 있다. 크기나 형태에 차이가 있고 바닥면이 굴착되었고 다른 시설이 전혀 없는 공통점이 있다.
출토유물은 대체로 석기와 민무늬토기조각들이다. 석기는 숫돌이 다수를 차지하고 이외 돌끌(석착)이나 돌도끼 등의 예가 있다. 주로 생활용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생업경제의 이해에 좋은 자료인 ‘丁’자형 석기와 머리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홈자귀(유구석부)는 남관리 유적이 청동기시대의 후반부에 형성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토기는 대체로 저부만 집중적으로 수습되었다.
남관리 유적의 연대는 홈자귀나 제5호 집자리 수습품인 돌도끼, 민무늬토기의 내용에서 보다 이른 시기로 판단할 수 있는 요소가 확인되지 않는 점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의 후반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