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야는 역사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표현이며, 『 삼국사기』 잡지 악조에 기록된 하가라도(下加羅都)의 하가라에서 가라를 가야로 치환해 조어한 것이다. 가야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한데, 그 가운데 가라의 경우 가야 전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특정하는 경우도 있다.
하가야는 현재의 김해 일원에 존재했던 금관가야의 이칭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 삼국유사』 등 옛 사서에 하가야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학계 일부에서 지리적으로 북쪽에 위치한 고령의 대가야를 상가야로, 남쪽에 위치한 금관가야를 하가야로 개념화한 것이다.
가야의 국명에 ‘상’ 혹은 '하'자가 붙은 사례로 상가라와 하가라가 있다. 『삼국사기』 잡지 악조에 수록된 우륵 12곡(于勒12曲)의 곡명에서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가 확인된다. 상가라가 고령의 대가야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만, 하가라가 어디인지를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하'라는 글자에 주목하여 고령보다 남쪽에 위치한 가야, 전기에 가야 연맹을 주도했던 가야라는 의미를 담아 금관가야를 하가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와 달리 상 · 하 가라 모두 대가야 연맹을 주도한 핵심세력으로 보면서 하가라를 합천군 쌍책면 혹은 봉산면 일대의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쌍책면 성산리에 소재하는 옥전(玉田) 고분군에서는 고령 지산동(池山洞) 고분군에 버금가는 다량의 위세품이 출토된 바 있다. 다만, 옥전 고분군 조영세력(造營勢力)을 다라(多羅)로 보는 견해가 있어 하가라가 다라의 이칭인지 등에 대해서는 상세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가야를 금관가야로 볼 경우 김해 대성동(大成洞) 고분군에 묻힌 인물들이 하가야의 중심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성동 일대에서는 서기 1~2세기경 축조된 목관묘(木棺墓)를 비롯하여 2세기 후반 이후 5세기 초까지 만들어진 다수의 대형 목곽묘(木槨墓)가 발굴된 바 있다.
다만, 고령과 달리 김해 일원의 고고학 자료에서 5세기 중엽 이후의 유력한 세력의 존재를 확인하기 어려워 학계에서는 상가야에 대응하는 하가야가 실제 존재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