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1년(공양왕 3)에 한어도감(漢語都監)을 개편하여 설치하였고, 여기에는 교수관(敎授官)을 두었다. 1289년(충렬왕 15)에 고려가 관청과 신하들에게 추렴을 한 대상에 한문도감의 전신인 한어도감이 200석을 내도록 나오고 있어, 1289년 이전에 한어도감이 설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1276년(충렬왕 2)에 처음으로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여 금내(禁內) 7관, 즉 비서성(秘書省) · 사관(史館) · 한림원(翰林院) · 보문각(寶文閣) · 어서원(御書院) · 동문원(同文院) 등 금내학관(禁內學官)의 6품 이하직에 있는 40세 이하 관원을 가려 뽑아 한어(漢語) 학습을 시켰다는 기록이 『고려사』 백관지 통문관(通文館)조에 나오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한어도감은 글자 그대로 한어를 학습하기 위해 1276년을 전후하여 설치된 기관으로 짐작된다.
뒤에 사역원(司譯院)을 두고, 여기에 이학교관(吏學敎官)을 두어 이문(吏文)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어(漢語)는 한족(漢族)의 언어 자체가 아니라, 북중국 지역이 오랜 기간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 기존 한족의 언어에서 변화된 한아언어(漢兒言語)라고 한다. 다시 말해 고려는 몽골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한족 중심의 중국어가 아닌 몽골과 소통할 수 있는 변형된 ‘한아언어’를 학습할 필요가 있었다. 한어도감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외국어 학습 기관이었으며, 한문도감은 그 후신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