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어(懸魚)라는 용어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중국과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현어가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에서 나온다. 여기에는 진골 이하의 집에 현어를 달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중국 송나라의 건축 서적인 『영조법식(營造法式)』에서는 현어를 도설과 함께 ‘수어(垂魚)’와 ‘야초(惹草)’로 기록하고 있다. 종도리가 놓이는 부분에 설치하는 부자재를 수어라고 불렀고, 중도리가 놓이는 부분에 설치하는 부자재를 야초라고 했다. 화려하게 조각한 것은 조운수어(雕雲垂魚), 조각이 없는 것은 색수어(索垂魚)라 불렀다.
고려시대에 그려진 여러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에는 많은 건축물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 건물의 지붕에서 현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역시 고려 말까지 박공에 현어를 매달아 거는 것이 일상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지붕의 형태가 크게 바뀌기 시작한다. 맞배지붕의 경우에는 박공 하부에 세로로 긴 널판지를 연달아 걸어 일종의 벽체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풍판이라고 한다. 팔작지붕 역시 맞배지붕과 같이 박공 하부에 나무판으로 풍판을 조성하거나 다른 재료를 사용해 완전한 벽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건축에서는 현어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현어와 유사한 형태의 판재가 박공면에 설치된 것은 익산 숭림사 보광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