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판소리계 소설로, 흥보전 · 박흥보전(朴興甫傳) · 놀부전 · 연(燕; 제비)의 각(脚; 다리) · 박흥보가 · 흥보가 · 놀부가 · 박타령 등으로도 불린다.
이본(異本)은 120여 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3년에 나온 「흥보만보록」이 가장 오래된 이본으로 알려져 있다. 필사본(筆寫本)으로는 「흥보전」 · 「박흥보전」 · 「연의 각」 · 「흥부전」 등의 이름으로 전하는 여러 가지 이본이 있고, 목판본(木版本)으로는 20장본과 25장본의 경판본(京板本)이 있는데, 25장본을 모본(母本)으로 하여 20장본이 나왔다.
활자본(活字本)으로는 신문관본 · 박문서관본 · 신구서관본 · 경성서적조합본 · 영창서관본 · 세창서관본 · 회동서관본 · 동양서원본 · 중앙인서관본 등이 전하는데, 이 중 영창서관본과 세창서관본 중에 ‘연의 각’으로 되어 있는 이본이 있다. 활자본 경성서적조합본은 한문본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흥부전」은 판소리로 불렸기 때문에 창본으로도 많이 전해진다. 「박타령」이란 제목으로 신재효(申在孝)의 「박타령」, 이선유(李善有)의 「박타령」이 있다. 그리고 「흥보가」란 제목으로 여러 종의 창본이 있다.
이들 이본은 경판본을 제외하고 대부분 판소리의 성격을 띤 서두로 시작되고 있어, 「흥부전」이 판소리 사설의 정착 과정에서 생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본 간의 관계를 보면, 경판본과 사본인 일사본(一簑本) 「흥부전」이 비슷한 내용을 지니고 있으나, 경판본이 훨씬 축약되어 있다. 신재효의 「박타령」이 가장 독창성이 강하며, 다른 이본들은 서로 비슷하다.
신재효본에는 흥부의 착한 행실을 말한 부분, 흥부가 놀부에게서 쫓겨 나와 오랫동안 빌어먹는 장면 등이 추가됐지만, 흥부가 매를 대신 맞으러 가는 장면 등은 빠져 있다. 신재효가 전래의 「흥부가」를 「박타령」으로 개작한 것은 대략 1870년대로 추측되는데, 개작 당시에 신재효의 독창성이 많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신재효의 「박타령」 개작은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놀부를 당당한 양반으로 높인 점, 흥부를 타락한 인물로 전락시킨 점, 작품에 담긴 서민적 삶의 발랄함을 거세한 점, 또 주제를 다분히 윤리 도덕적으로 바꾸어 놓은 점 등은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평가될 수 없다.
작품의 지역적 배경에 대해서, 일사본 · 신재효본 · 「연의 각」 등에서는 모두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삼도의 어름이라고 하였는데, 경판본에서는 경상도 · 전라도 양도의 어름이라고 하였다. 또 경판본에서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성씨 없이 놀부 · 흥부로만 하였는데, 세창서관본에서는 두 형제가 연 생원(生員)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신재효본에는 박가(朴哥)로 나온다.
「흥부전」의 기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삼도의 어름에 악하고 사나운 형 놀부와 순하고 착한 아우 흥부가 살았는데, 놀부는 부모의 유산을 독차지하고 흥부를 내쫓았다. 아내와 많은 자식과 함께 쫓겨난 흥부는 할 수 없이 언덕에 움집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집에 먹을 것이 없었다.
하루는 흥부가 놀부의 집으로 쌀을 구하러 갔으나 매만 맞고 돌아왔다. 흥부는 여러 가지 품팔이를 다해 보아도 먹고 살길이 없어, 대신 매를 맞아 주는 매품팔이를 하나 그것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해 봄, 제비가 돌아와 집을 짓고 사는데 새끼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흥부가 새끼 제비를 불쌍히 여겨 그 다리를 매어 주니, 제비가 고마워하며 날아갔다. 그리고 제비는 그 이듬해 봄에 돌아올 때 박의 씨 하나를 물어다 주었다. 흥부는 그 박의 씨를 심어 가을에 큰 박을 많이 땄다. 그런데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와 흥부는 큰 부자가 되었다.
놀부가 이 소식을 듣고 제비 새끼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 날려 보냈다. 이듬해 봄에 놀부는 제비가 가져다 준 박의 씨를 심어 많은 박을 땄다. 그런데 그 속에서 온갖 몹쓸 것이 나와 놀부의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 흥부는 이 소식을 듣고 놀부에게 재물을 주어 살게 하고, 그 뒤 놀부도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사람이 되었으며 형제가 화목하게 살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흥부전」의 근원 설화(根源說話)에 대해서는 첫째 고유설화, 둘째 고유설화와 외래설화와의 혼합, 셋째 몽고설화, 넷째 불교설화(佛敎說話)라는 네 가지 방향으로 추론되었다. 그리고 그중에도 몽골의 「박타는 처녀 설화」가 「흥부전」의 내용과 비슷하여, 「흥부전」과 가장 가까운 설화로 지목되어 왔다.
그러나 「흥부전」의 설화적 골격은 악하고 착한 형제가 등장하는 선악형제담, 동물이 사람에게서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한다는 동물보은담(動物報恩譚), 어떤 물건에서 한없이 재물이 쏟아져 나오는 무한재보담(無限財寶譚)이라는 세 이야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설화는 선악형제담으로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흉내 내다 실패한다는 모방담(模倣譚)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혹 떼러 갔다 혹 붙이고 온 영감」 · 「소금장수」 · 「부자 방망이」 · 「금도끼 은도끼」 · 「단방귀장수」 · 「말하는 염소」 등의 구전설화(口傳說話)가 이와 동일한 유형의 설화에 해당한다.
또, 동물보은담에 해당하는 설화로는 『육도집경(六度集經)』의 「방구보은설화(放龜報恩說話)」, 『삼국유사』의 「자라토주설화(吐珠說話)」, 그 밖에 구전설화인 「새보은설화」 · 「사슴보은설화」 등이 있다. 무한재보담으로는 구전설화 「이상한 남」 등이 있다. 결국, 선악형제담 · 동물보은담 · 무한재보담이 「흥부전」을 구성하는 3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3가지 이야기는 불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 「흥부전」의 근원 설화에 해당하는 불전설화(佛典說話)로는 『현우경(賢愚經)』의 「선구악구설화(善求惡求說話)」, 『잡비유경(雜臂喩經)』의 「파각도인설화(跛脚道人說話)」 등을 들 수 있다. 결국, 「흥부전」은 원래 불전설화였을 근원 설화가 민간설화(民間說話)로 흘러 나가 전승(傳承)되는 과정에서 불교적 의미가 탈색되고, 조선 후기의 사회적 배경이나 현실 인식 등을 담아 내면서 발전한 작품이다.
「흥부전」은 조선 후기 서민 사회에서 광대 · 가객(歌客) 등 서민 예능인들에 의하여 형성된 작품이다. 그러므로 당시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작품을 생성 · 향유했던 서민 계층의 의식이 잘 투영되어 있다. 특히, 두 주인공인 흥부와 놀부는 당시 서민 사회의 일정한 신분적 특징과 유형을 반영하는 전형적 인물(典型的人物)로 투영되고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흥부와 놀부는 같은 형제이면서도 양반과 천인(賤人)으로 그 사회적 신분이 서로 다르게 설정되었다고 보며, 그 이유를 판소리계 소설의 중요한 특징인 부분의 독자성이라고 본다. 작품의 사회사적 의미를 화폐 경제의 발달, 천부(賤富)의 대두와 물질적 가치관의 성행에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이와는 달리 흥부와 놀부의 신분 관계가 같은 서민층으로서, 서민층의 양면성을 반영했다고 본다. 놀부는 요호부민(饒戶富民)을 반영한 인물이지만, 흥부는 소작(小作)의 기회마저 얻지 못한 채 모든 생계 수단을 상실하여 품팔이꾼으로 전락한 영세 농민(零細農民)을 반영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견해차가 있어도 「흥부전」이 당시 서민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고, 서민 계층의 삶과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흥부전」은 대체로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 윤리 소설로서 인과응보에 따른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와 사상을 지닌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적 윤리 도덕만이 「흥부전」 주제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그 이면에는 현실주의적인 서민의 새로운 세계관이 제시되어 있다. 당시의 급변하는 현실 사회에서 몰락한 양반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아직도 양반으로서 위세를 부리려 하는 기존의 관념이 허망하다는 것이다. 또한 물질적인 것을 원하고 소유하는 존재인 자본주의적 인간형, 선악의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인 심성적 인간형, 생명적 존재인 장부(臟腑)적 인간형이 작품 속에서 서사적인 방식으로 인성 논쟁을 벌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