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학은 영국의 빅토리아 시기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며 박물학자로서 다윈의 관찰과 기록은 생물학, 광물학, 지질학 등 박물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었다. 박물학의 발달은 예술과 더불어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등 유관 학문과 관련을 가지면서 다양성과 복잡성이라는 차원에서 더욱 심화되어 갔다.
19∼20세기에 들어 박물학은 본초학(本草學)을 대체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주로 동 · 식물, 광물 등의 표본을 연구하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일본에서 시작된 박물학 관련 저술들의 번역과 학문적 유행은 1920년대 중반부터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박물학회가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1923년 창립되어 『조선박물학잡지(朝鮮博物學雜誌)』를 1924년 창간하여 1944년까지 발간하였다. 광복 이후 일부 학자들이 조선생물학회를 설립하게 되면서 박물학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흔히 박물학자는 동물학자, 식물학자, 곤충학자 등을 총칭하여 부르기도 하였으며 생물의 전 범위를 다루기도 하였다.
박물학은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한 동물 · 식물 · 광물의 종류 · 성질 · 분포 등을 기재(記載)하고 정리 · 분류하는 학문이었으며 다양한 자연물의 각 특성을 밝혀내는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걸쳐서 박물학자가 배출되었는데, 그들 노력의 많은 부분은 동물들 각 분류군의 기재와 분류에 집중되어 있었다.
중세유럽에서 제국주의의 대두와 함께 신비한 동식물 등을 찾아 많은 탐험여행이 시도되었으며 그에 따라 방대한 양의 박물학적 지식이 축적되었다. 이들 다양한 자연물은 지구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인식과 함께 박물학은 자연사학(自然史學)으로서의 성격도 같이 지니게 되었다.
그 후 박물학이라는 말은 기재 · 분류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면서 한편에서는 자연, 특히 생물적 자연의 다양성과 그 역사의 연구라는 의미를 계속 지녀왔다.
현대에는 자연물에 관한 각 분야의 내용들이 세분화되어 다루어지면서 박물학이라는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박물학이란 용어는 일제강점기 전후로 많이 쓰였고, 생물을 연구대상으로 다루던 1900년대 초 · 중반의 학자들이 박물학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분화 · 발전에 따라서 각 분야의 자연과학이 확립되어 점차 사용하지 않는 용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자연과학, 특히 동 · 식물과 광물 분야의 학문적 발달에 박물학은 기초가 되었으며 생물학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일반인들로 하여금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함과 동시에 유용한 과학적 정보들을 제공하였다.